먼저 극악의 상황에서 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UDT/Seal 대원들께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성공에 가려진 지휘부와 정치권의 실수는 2번 다시 되풀이 되면 안되겠기에 이렇게 포스팅을 남깁니다.

전체적인 작전 일지는 부산일보의 엠바고를 깬 폭로이후로 모니터링 하고 있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한마디로 어이상실. 만약 상대가 해적단이 아니라 정보력이 뒷받침되는 국가였다면 그 뒷책임은 어떻게 할것이었나?)
구축작전은 부산일보의 폭로대로 18일 1차전을 치뤘다.
근해를 지나가던 몽골상선을 덮치려고 해선 4~5명이 자선으로 하선하자 (간뎅이가 부어도 엄청 부었다. 구축함옆에서 그런 행동을 하다니...) 기회를 보고있던 UDT대원들이 상선으로 달려나갔고 이와 동시에 링스로부터 총탄이 쏟아져 4~5명의 해적들은 바다로 풍덩하고 우리쪽 3명은 그 와중에 부상을 입게되었다.

만약 해적들이 경험이 있는 녀석들이었다면 선장 또는 조타실 요원 등 바로 옆에 있는 인질들을 함교로 데리고 와서 자신들이 잃어버린 숫자만큼 공개처형했을 것이다.

* 뮌휀의 참극. 어설픈 인질구출의 끝.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리 군사 작전이라고 해도 이런식의 보복의 책임 전가는 충분히 효과가 있다. (물론 러시아에게는 개뿔이겠지만...)
그러나 해적들은 이 시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냥 도망가서 숨고는 석해균(57)선장을 채근해서 빨리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여기서 석해균 선장님의 기지가 살아난다. 평시에는 공제상선 공용망을 통해 영어로 이야기하다가 한국어로 해적에 대한 정보를 계속 주시고 지그제그 운행에다가 식량 바닥이라고 속여서 해적들을 굶기기 까지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때문에 후에 총상을 입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3일이 흐르고 드디어 제대로된 진압작전이 펼쳐진다.
1차 작전 실패의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2차 작전이 개시된것이다.
먼저 헬기와 함포로 경고사격 및 정밀 저격작전에 들어가며 해적들을 선내로 밀어 붙이는 데 성공한다.

그 이후로는 잘아는 그대로다.
먼저 헬기의 위압사격을 지속하고 고속정에 2개 팀이 따라 붙는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빠른 속력으로 따라붙은 (무려 3.5km를 달려서) 고속정이 헬기의 엄호속에 후미로 따라붙었고 곧이어 구출부대가 투입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곧 2개팀으로 나뉘어 수색에 들어갔으며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가장 중요한 조타실에서 일대 격전이 펼쳐진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내 해적들을 제압하고 구출에 성공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나머지는 체포하게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문제로 제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작전 전체에 들어난 느낌이다.

1. 상황을 자칫 극악으로 밀어넣을 뻔했던 1차 작전의 실패다.
지휘부는 아무런 준비없이 적이 움직인다는 이유만으로 대원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오히려 해적들의 자선이 떠나고 나서 방심하는 틈을 노렸어야 했다.

2. 작전 전반에서 느껴지는 위에서의 압박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작전을 개시해서 선원들을 구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이대목에서 생각나는 인질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페루의 일본 대사관 사건"

1996년 12월 17일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열렸는데 MRTA라는 반군 게릴라 14명이 대사관에 난입하여 7백여명의 인질을 붙잡게 된다. 물론 당시 일본계이던 후지모리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이원영 대사도 인질에 포함되었으나 긴 협상 끝에 1차 인질석방에 포함되었다.
이에 페루정부는 땅굴을 통해 대사관으로 진입할것을 계획하고 주변 소음을 최대한 활용하여 땅굴을 팠고 4개월만인 4월 22일 오후 3시경 땅굴 3개소 입구에 폭약을 터트려 축구하던 인질범 3명을 폭사 시키며 140명의 특공대를 투입한다. 땅굴과 옥상으로부터 진입한 특공대는 인질이 있는 2층으로 제빨리 돌입하여 14명의 인질범을 사살하였고 그 총격전 와중에 2명의 특공대원이 희생되었으며 인질 1명이 사망한다.

당시의 페루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후지모리 대통령의 상황을 보면 답이 좀 나온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91년 수도 리마에서 특수부대를 동원해 민간인 15명을 살해
- 92년에는 특수부대를 파견해 학생과 교수 10명을 살해
- 92년 군대를 등에 업고 의회를 강제해산한 뒤 95년 4월 재선
- 96년 일본대사관 인질구출성공
- 2000년 4월에는 부정선거 논란 속에 3선에 성공했다. 같은 해 7월 부정선거와 횡령 의혹 등이 제기됐고 측근이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공개

이후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2005년 칠레에서 체포 페루로 이송된 전대통령은 징역 2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렇다고 이사람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농과대학 교수로 오히려 깨끗한 이미지 였고 집안 소유의 땅을 팔아 선거자금을 마련하고 트랙터를 개조해서 선거유세를 나섰던 사람이다. 빈곤층의 지지를 받으며 당선되었지만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다.

96년 당시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어떻게든 후지모리로써는 국면전환이 필요했으며 단 한방의 군사작전으로 지지율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다시말해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과 유사하다.
천안함피격과 연평포격전을 통해 정치권에 쏟아지는 화살을 다 맞아야 했고 고물가로 인해 대통령의 지지율은 계속 하락세였다. 거기다가 파병군인회나 노인들을 동원해 반대파에 대한 백색테러도 마다하지 않았던 정권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정치적 국면해결을 위해 무언가 필요했고 2010년 12월 천안함피격으로 해군에 내주었던 합동참모본부 합참 작전부장 자리를 연평포격전 이후 육군으로 원복 시킨 상태였다. 즉, 정치권과 군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자 거국적인 일치단결로 본 작전이 진행된 느낌이다.

목적은 숭고하나 다수보다는 나와바리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이번 작전은 이러한 몇몇 부분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한도에서 가장 효율적인 작전을 구사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우리가 대형헬기가 있었다면 초기부터 헬기강습에 의한 작전을 구사했을 테고 저리 무차별 사격을 하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기습의 효과가 사라졌음에도 이러한 작전의 성공은 하늘의 운이 따라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 석해균(57)선장님"과 UDT/SEAL 대원 3분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PS. K-6의 위력이 새삼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Cal. 50 탄이 쎈줄만 알았지 저정도 인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몇몇 피탄흔적을 보면 거의 어른 얼굴 크기만한데다가 강판을 저리 짖니겨 높을 정도니...

2011/01/22 23:43 2011/01/22 23: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