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학교(초등학교)때 국가의 3대 조건으로 항상 귀에 박히도록 들어온 "국민","주권","영토"가 있어야 국가가 성립한다는 이야기 공부를 아무리 안했더라도 국민 대다수가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런데 영토가 없는데도 국가로 인정받는 나라가 있다.
바로 몰타 기사단(Ordine di malta)병원기사단, 구호기사단, 로도스 기사단, 성 요한 기사단이라고도 불렸음)이라는 나라이다.

600년 교황 그레고리 1세의 지시로 "아붓프로브스"라는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성지 순례자를 치료할 목적으로 병원을 세운다.
1005년 파괴되었다가 1023년 이탈리아 상인인 "아말피"와 "살레르노" 2사람이 다시 병원을 세웠다.

도적때에 가까웠던 "군중 십자군 원정"이 실패한후 "1차 십자군 원정"으로 예루살렘은 "가톨릭 "의 지배에 들어가고 이때부터 단순한 병원이라기 보다는 성지순례하는 순례자를 보호하는 경비/경호조직으로 바뀌었고 곧 군사조직으로 거듭난다.

1291년 모든 이슬람의 영지가 수복되고 가톨릭 세력이 추출되자 "키프로스 왕국"으로 철수한후 다시 수복할 것을 천명하였다.

드디어 1309년 터키 남부의 로도스섬을 공격 점령하고 병원을 세운후 대 이슬람 전쟁에 나선다.
(거의 해적에 가까웠던...)

*로도스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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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입장에서 보면 한줌도 안되는 병력가지고 전쟁하겠다며 상선을 괴롭혀 대니 얼마나 짜증이겠는가? 곧 추출되고 서유럽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였다가 1530년 로마 제국 카를5세가 몰타에서 살라며 땅을 내어준다.
이때부터 자신들을 몰타 기사단으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이후 몇백년은 지중해에서 그동안 익힌 항해 기술로 잘 살았다고 한다.
문제는 1798년 나폴레옹이 주먹 한번 들고 흔들어 보이자 "같은 가톨릭인과 전쟁할 수 없다"면서 항복해버린다. (아마도 비슷한 기독교인인 이X박 대통령께서 주먹 한번 휘두르면 다시 항복할 것이다.)
아무튼 또 떠돌이 신세로 전락하여 유럽을 전전했고 특히 러시아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러기를 몇십년 하다 1834년 로마에 정착하였다.

1986년 몰타공화국에서 일부 영토를 제공하기로 하였고 최근 몰타의 버구(Birgu)타운 근처 세인트 엔젤로 요새(Fort St. Angelo)에서 99년간 임대형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현재는 의료/봉사에만 국한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자체 군사력은 없는 상태이다.

아무튼 이 기교한 나라는 유럽 대부분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국가로 인정하고 있고 자체 법원, 외교관, 우표 등을 발행하고 있다.

* 최근 입주한 Fort st Angelo의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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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식 홈페이지는 여기 : http://www.orderofmalta.org/
2008/02/13 16:22 2008/02/13 16:22

먼저 스마트 프레이스라는 유명한 사이트의 글을 한번 읽어보자.

삼성 SDS, LG CNS, SK C&C 그리고 기타 업체들

안녕하세요. 스마트플레이스의 치프 블로거이자 개인 블로그 피플웨어를 운영하고 있는 류한석입니다.

이 포스트는 여러분의 의견을 듣기위한 포스트입니다.
 
이번에 매체에 칼럼을 쓰는데, 국내 소프트웨어 업계의 현실을 주제로 쓸 예정입니다. 한국의 경우 유독 SI 위주의 기형적인 소프트웨어 산업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통계에 따르면 삼성 SDS, LG CNS, SK C&C 상위 3개사가 매출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참고: SW 진흥법 개정안 상정을 환영하며)

저는 대기업 계열 SI업체들로 인해 한국 소프트웨어 산업이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것은 혈액순환이 완전히 막혀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만의 리그입니다.
 
패키지 소프트웨어는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많은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솔루션을 가장한 SI로 먹고 살고 있습니다. 저 또한 사회 생활을 SI로 시작하였으며, 눈물을 흘려야 했던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대기업 계열 SI업체들에 대한 여러분의 의견, 그리고 직접 일을 하면서 또는 협력 업체로서 겪은 사례들에 대해 코멘트를 남겨주시면 칼럼 작성시 참고하겠으며 필요하면 인용토록 하겠습니다.

언제나 고맙습니다.
대한민국 소프트웨어 발전과 개발자의 개인 복지를 다 아사가는 것이 모두 대형 SI책임이라고 한다.
그렇다. 대형 SI회사 책임맞다.
첫째, 그렇게 많은 돈을 가지고 제대로된 방법론이나 SI사업시장 확대, 솔루션에 투자가 아주 미미하다.
둘째, 대형 SI가 CAP만 씌워서 매출 가져가는 프로젝트 많다. 인정한다.
셋째, 협력사에게 무례하게 굴은 경우 굉장히 많다. 이것도 인정한다.

그러나, 이게 개발자의 개인적인 복리후생과 무슨관계인가?

오히려 구조적인 문제는 아닌지 봐보자.
첫째, 소형 SI업체가 너무 난립하고 있다. 솔찍히 A라는 업체 마음에 안들면 B로 바꾸는거 다반사다. 그만큼 종속된 기술도 아닐뿐더러 기술자체가 쉽다. 특히 인터넷개발이 그러하다.
둘째, 솔루션...솔루션하는데 대한민국에 불법복제때문에 솔루션 시장자체가 존재하는가? 대한민국 대학생들부터가 불법복제로 무료로 사용하고 기업도 SI개발비 몇푼은 아쉬워도 하드웨어 아쉬워 하는데 못봤다.
셋째, 지금 개발하는 방법 그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본적은 없는지? CRUD니 ERD니 실컷 그려놓으면 뭐하나? 문서를 위한 문서일뿐인데...
*CRUD와 ERD. 쉬파. 나도 존나 짜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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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솔찍히 작은 협력사 인원해봐야 20명정도이다. 이정도면 꽤 규모 있는 회사인데 프로젝트에 한 3~4명 투입한다고 치자. 그럼 3달 개발한다고보면 1인에 500만원씩 한 6천짜리 개발하는거다. 규모있다고 치는 10억이상이면? 6개월정도 잡고 한 30명 투입해야 하는데 상시 30명 스텐바이하고 있는 회사가 몇이나 되나? 결국 돌려막기하는거다. A프로젝트 투입되어 있는 인원을 밤에 불러서 B프로젝트 일 도와주게하고 B프로젝트인원은 C프로젝트 휴일에 불러서 일시키고 이런식으로 사람돌린다. 이게 현실이다.

다섯째, 새로운 방법이 있다고 다른길로 한번 가보자고 하는 인간 한번도 못봤다. 입으로는 객체지향이라고 떠들면서 UML툴로 요구사항수렴, 분석, 객체설계, 컴포넌트설계, 개발, 테스트, 배포까지 흐름을 제대로 타고 문서를 위한 문서가 아닌 정말 개발을 위한 문서작업을 해본 개발자는 몇이나 될까? 아마도 이글을 보는 10명중에 1명 될까 말까할것이다.

여섯째, 정보통신부 단가표를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 정보통신부 스스로도 지키지 않는 단가표를 공표하다보니 어떠한가? 일반 기업에서는 30% 우습게 치고 들어간다. 그래서 재경비에 기술료 포함해서 중급개발자 690만원짜리가 500만원되고 이걸로 기업하는 사람입장에서 월급주고 사무실 운영하고 전기세에 기타등등 굴리는 거다. 물론 이 구조의 장점도 있다. 힘없는 작은 업체가 최소한의 개발비는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업체들의 보호하기 때문에 다른 경쟁력 있는 업체가 크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시장을 수백개의 업체가 나눠먹기하고 있는데 어떻게 돈을 벌것이며 어떻게 회사규모를 키울것이가? 결국 규모가 되는 대기업이 따먹게 되는 구조인것이다.

일곱째, 개발자 스스로 한번 물어보자. 고객입장에서 고객이 원하는 산출물을 만들어주기위해 노력했냐고... 고객과 싸우는 개발자 한두명 본것도 아니고 고객이 A라고원했는데 B라고만들어와서는 B가 더 쓰기 편하니 그냥 쓰라고 우기는 개발자 수두룩하다. (설계서하고도 딴판이니 더욱 가관) 거기다가 10년전쯤 부터 개발자=웹스크립트개발자라는 이상한 등식이 거의 박혀있다보니 노가다 하고있는것이다. 웹스크립트가 컴포넌트 베이스처럼 심플하기는한가? HTML코딩하고 디자인 신경쓰고 뭐 어쩌다보면 사용자 UI라는 측면하고는 완전 동쩔어지게 마련인데다가 WEB은 스크립트 어느정도 공부하면 되기때문에 진입장벽도 낮고 더이상 발전이 없는경우가 허다하다. "원래 팔자가 노가다인 웹개발을 하면서 노가다가 싫어요"하는것은 조금 우습지 않을까?(했던 코딩 또하고 또하고 또하고...) 더군다나 UML2.0 MDA가 지원되면서 왠만한 코드는 UML만 그려놓으면 90%정도의 완성도로 자동으로 생성되는데 그래도 코딩한 할렵니까?

대기업만 가지고 두들겨 패는 편엽한 생각에 나도 모르게 같은 밥 먹고사는 개발자들끼리 싸움붙이는 정부기관이 미워서 이렇게 내 블로그에 한마디 남긴다.

긴훗날 이글을 보며 이렇게 힘들게 일할때도 있었구나 추억으로 간직하고 싶다.
2007/07/23 23:59 2007/07/23 23:59

한인 민초운동이 이룬 ‘위안부 美의회 결의안’ (헤롤드 생생뉴스)
美하원 위안부결의안 압도적 다수 통과 (연합뉴스)
숨가쁜 ''막후 외교전''… 日 눌렀다 (세계일보)
미하원 외교위, 성노예 결의안 압도적 통과 (조선일보)
위안부 결의안 채택…일본 정부 '내심 곤혹' (SBS)

등등등 각종언론에서 6월 27일 내보낸 기사의 타이틀들이다.
본 법안이 생기면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조사를 해봤다.

1999년 켈리포니아 주의회의 일본계 3세 혼다의원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하여 일본정부에게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 혼다결의안을 발의하였다.
이때만해도 그리 알려진 이슈가 될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본계인사들의 공분을 샀고 엄청나게 거센 압박이 왔다고 한다.
그때 혼다의원은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고 김영옥 예비역 대령을 찾아간다.
2차대전 일본계 참전용사회를 이끌던 김영옥 대령은 혼다의원의 이야기를 듣고 참전용사회의 회원들에게 지지서명을 받아 혼다의원에게 전달했다.
혼다의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2차대전 "일본계 참전용사회"의 지지 서명으로 일본계 내부의 의견은 뚜렸해진것이다.
그리고 8년후인 2007년 6월 26일 일본의 거센반발과 WP지에 자기변명과 미국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을 하는 패착으로 혼다 의원의 결의안은 하원을 통과했다.

그럼 과연 2차대전 참전용사회는 무엇이며 김영옥 대령은 누구이길레 일본계 이민자사회의 목소리를 한방에 잠재울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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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생이신 고 김영옥 대령은 LA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김순덕님과 노라 고님사이에 태어나셨고 1939년 육군 모병소로 찾아갔으나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941년 아시아계도 받아 주게 법령이 정비됨에 따라 그는 사병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계 이민자들을 사막의 수용소로 집어 넣었고 일본계 이민자들은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달라고 탄원하는 등 속칭 "니세이 부대" 100대대가 창설되게 되었다.
*훈련받을때의 100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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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100대대는 442연대 1대대로 다시 구성된다.
당시 젊은 김영옥은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장교후보생으로 교육받았고 임관후 이곳 442연대 1대대로 전입오게 된다.
대대장은 김영옥에게 한국계와 일본계가 사이가 좋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인이 자신들을 지휘하는것에 대해 사병들이 문제를 일으킬것을 우려하여 다른 부대로 전출을 제의하였지만 "우리는 미국인이며 같은이유로 싸우려 할뿐입니다"라며 Bravo중대 2소대장으로 장교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실상 100대대(442연대)는 젊은 일본 이민계를 잡아두는 구실이었을 뿐 전장으로 보낼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사실 미국으로서도 행여 이 아시아 부대가 전장에서 공훈을 세우기라도 하면 타오르는 일본에 대한 적계심도 누그러질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최초의 파병은 이미 전투가 끝난 북아프리카였다. 부대원과 부대 지휘관의 강력한 항의로 이후 5군단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곧 볼투르노 강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특히 독일 공수부대가 방어하여 악마의 산이라 불린 안지오에서는 독일 전차부대 위치를 알아 내기위해 아카호시 일병 (Irving Akahoshi)과 함께 대낮에 적병 2명을 사로 잡아 중요정보를 캐내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연합군은 꽉 막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결적적인 정보였다.

*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행군중인 442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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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전선에서 소대장이 적전을 관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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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기상천외한 전술로 독일의 방어선이었던 구스타프 라인과 고딕 라인의 붕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피사를 공략할때 피사의 탑위에 맨처음 올라간 연합군역시 바로 그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전선 참전 후에는 남프랑스에 작전장교로 투입되었다. 브뤼에르와 비퐁텐느란 두 마을의 해방에 앞장섰으며, 이 중 남프랑스의 비퐁텐느의 교회 벽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마을 노인들도 그를 전쟁영웅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까피텐 김”(김 대위)으로 불린다. 비퐁텐느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1944년 말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휴식을 가졌다. 이후 유럽으로 돌아가려 하는 찰나,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이후 그의 전술은 연구대상이 되어 미육군 군사교본을 다시쓰게 만들었다.

이후 이 젊은 영웅에게는 꿈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던중 1950년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 당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던 김영옥은 재입대했고 대위로 군에 복귀하였다.
참전후 한국인 유격대인 배내대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배내대 유격대는 흥남 철수 때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 중에서 선발한 유격대였다. 이 임무를 마친 후 김영옥 대위는 7 보병사단 31연대의 정보참모가 되었다.

1951년 4월, 31연대가 소양강을 건너 17연대와 임무 교대하자마자, 중국군의 춘계 공세가 개시되었다. 31연대는 다시 소양강을 건너 철수했는데, 김영옥 대위에게 미군 및 한국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인제군 계운동 계곡의 다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차 1개 소대를 이끌고 완전히 후퇴할 때까지 최소한 몇 시간을 버티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차 소대를 다리 남쪽에 세워 놓고 김영옥 대위는 후퇴하던 중대급 한국군 보병들을 멈춰세운 후, 그들과 함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여 후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51년 10월, 김영옥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1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 백인 병사들을 지휘하는 보병대대장이 된 사람은 미군 역사상 김영옥 소령이 최초였다. 그만큼 김영옥 소령이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31연대장 맥카프리 대령의 지시로 5월 23일부터 실전 경험이 없던 대대장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이 조치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미국에서 유색인종 최초 대대장이라는 수식어는 현재도 남아 있다.

1951년 5월 무렵, 31연대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와 함께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연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큰 패배를 당한 휴우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김영옥 대위가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병사들의 사기 고양이었다. 구만산·탑골 전투에서는 전진하기를 주저하던 병사들을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고, 금병산 전투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데 팔짱을 끼고 태연히 돌아다니며 엄폐물에 숨어 총만 높이 들어 마구잡이 사격을 하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자기 목숨을 내놓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부대 사기는 다시 올라갔고, 그가 담당한 구역은 처음과 달리 5월 31일 이후 다른 대대들과 달리 60km나 북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형태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철의 삼각지대에서 아군의 오인 포격으로 중상을 입은 김영옥 대위는 일본의 오사카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8월 27일에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 후 10월에 소령으로 진급하고 은성무공훈장 및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정식으로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연대장이 병사들을 무리하게 전투에 내모는 것에 반대했고, 그 때문에 1952년 9월에 반강제로 귀국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포트 베닝의 미국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1956년부터 1959년까지는 독일에서 7사단 86연대 2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59년 중령으로 진급한 후 캔자스 주의 포트 리브에서 교관으로 근무한 후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다시 대한민국에 부임했다. 부임 후, 전시 방어 체제, 예비 병력 동원 체제, 청와대 방어 등의 기초를 고안했고, 영공 방어를 위한 대공미사일부대 창설을 군사고문단 내에 건의하여 호크 미사일부대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65년 대령으로 진급한 김영옥은 유럽과 하와이를 돌며 근무하다가 1972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여러 사회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입은 부상이 50여년 동안 그를 괴롭혔고, 말년에는 방광암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2005년 7월, 방광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던 김영옥은 그해 말에 결국 사망했다. 사망 후 하와이 주 호놀룰루 근처 펀치볼 국립묘지의 100대대 묘지 근처 영면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명의 군인으로 최고였던 김영옥은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명예는 사회 봉사활동으로 빛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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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보병대대장으로 근무하던 김영옥은 부대 군목이었던 샘 닐이 고아 몇 명을 데려오자, 직접 고아원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고아들을 보호하도록 했다. 또 재정 면에서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을 지원했다. 휴가를 나가는 병사들에게 위문품을 들고 고아원을 방문하여 고아들과 어울리도록 했다. 이는 고아원을 도울 뿐아니라, 병사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김영옥의 대대 장병들은 자기 봉급에서 1~2달러씩 갹출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지역 사회에서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이 김영옥의 노력으로 탄생한 단체이며, 인종 차별 철폐 운동과 미국에서 가정 폭력을 당한 아시아계 여성들을 위한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을 건설했다. 이런 노력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훈장 모란장과 한국방송공사의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노령과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김영옥은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조사를 위한 조사 위원회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442연대를 기념하기 위한 고 포 브로크 재단(Go For Broke)설립하는등 수많은 사회봉사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사회활동은 전쟁영웅을 더욱 돗보이게 하였으며 우리는 오늘 그의 그림자인 혼다의원을 통해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라는 과실을 보게 된것이다.

그를 아는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 중령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
- 마크 클라크 前 미 5군 사령관
"미 보병학교 시절 한국계인 김영옥 대령 덕에 어깨가 으쓱했다."
- 채명신 前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닮았으면 하는 인물"
- 김영옥의 전기를 쓴 한우성

그의 업적만큼 훈장도 엄청나다.
이탈리아 -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 십자무공훈장(1950년), 레종도뇌르 훈장 (2005년 2월)
미국 - 무공훈장 등 10여 차례 받음
대한민국 - 국민훈장 모란장(2003년) 태극무공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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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드오브브라더스에서 흰 콧수염 날리던 "로버트 싱크"대령을 기억하시는지? 윈터대위를 인정하고 물심양면 잘 끌어 주셨던 그분! 그분이 한국전 당시 김영옥대령이 속한 7사단 부사령관이었다. 김영옥 대령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수많은 작전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 극중 로버트 싱크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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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 로버트 싱크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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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2연대의 치열함은 전투 참전사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안지오 공략전은 최고의 정예들이 맞뭍은 전투였다.
- 2차대전
Naples-Foggia
Anzio
Rome-Arno
North Apennines
Rhineland
Po Valley
-걸프전
iraq

* 김영옥대령의 장례식 사진들을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 Wiki에서 442연대에 대한 자료를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 Wiki에서 100대대에 대한 자료를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2007/06/27 10:48 2007/06/27 10:48
2007년 4월 4일 - 한미 FTA 타결
2007년 4월 10일 - 중국 원자바오 총리 한국방문 "조속한 FTA 체결 희망"

김대중정부의 핵심대외 정책이 2가지 있었다.
하나는 대북정책인 햇볕전략과 나어지 하나는 대외정책인 동북아 허브전략이다.

첫번째, 햇볕정책은 북한의 인민에게 한국 정부가 직접 지원하여 한국의 인지도를 높이는 전략이며 비무장지대를 관통하는 철로와 도로는 햇볕정책의 상징물이다.
솔찍히 말도 많고 탈도 많으며 욕도 많이 먹는것은 사실이고 북핵으로 빛이 바래버렸지만 남북관계에있어 한걸음 더 밀어 붙였다는데에 점수를 +1점 주고싶다.

두번째, 동북아 허브전략은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중국과 일본, 미국, 러시아를 중계하겠다는 전략이다. 한마디로 동북아지역 모두에게 영향력을 끼치겠다는 전략이다. 뻔히 보이는 전략이기에 미국이 발끈한다. 그래서 김대중정부와 노무현 정부가 미국에 찬밥대접 받은것이다. 더군다나 "고이즈미"의 행보가 가관이었다. 부시네 집에 방문해서 부시 앞에서 노래와 춤까지 춰가며 비위를 맞추려고 무진장 오바했고 미국은 그런 꼬봉을 제식구 감싸듯 감싸주기에 바빴다.

그러나 그게 빗나가게 된 계기가 있으니 바로 "일본의 상임위 입성 저지사건"이다.
한국 외교계의 계가이기도 한 일본의 상임위 저지는 독일과 일본이 상임위의 의석을 늘리자고 한데서부터 시작된다.
이에 한국 노무현 대통령이 쓩하고 독일로 날라가 한마디 한다.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만 증설되면 우리는 너희처럼 과거에 용서받고자하는 독일에게 기꺼이 돕겠다."
일본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려 놓은 노통. 그리고 의석을 늘리자고 하던 세력의 한축인 독일을 아군으로 만들고 일본을 고립시켜 버리는 한방. 그리고 나서 한달후 코피아난 UN총장을 만나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나라는 검증해야한다"라고 못을 박아 버린다.
당시 일본의 상임위를 밀어주던 나라는 미국. 미국이 발끈해버리고 "주한미군 철수시켜라!!" 어째라 하던때가 이때쯤부터 터져나오던 이야기들이다.
그러던 것을 상임위 의석 증설 반대 회원국 모임을 프랑스와 같이 주선해버리고 이자리에게 제3국가들과 함께 반대 서명.
결국 일본의 UN상임 이사국 진출은 의석수 증설의 부결로 무산되어 버렸다.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UN사무총장자리까지 따버린다.
(당췌 왜 이런 외교력이 대북외교와 자국민 보호외교력으로 나오지 않는지는 알수 없지만 한국이라는 브랜드를 팔고 편갈라서 자기편 만드는데는 외교부가 최고다!)
이쯤해서 또 하나의 사건이 있다.
미국에서 주한미군 철수시키라는 여론이 형성되고 실재로 감군하고 철수하려한다. 그 명분이 "시설이 낙후 되고 어쩌고..." 그러자 한국정부는 여기에 물타기해버린다.
"OK! 시설 져주고 너네 전방근무 힘들다고 했으니 후방으로가있어!" 그게 평택이다.
공짜로 시설 져주고 훈련장 만들어 주고 덜위험한 후방으로 가라는데 안갈 군바리 있겠는가?
더군다나 수많은 시민단체들이 반대하는데 "두들겨 맞는 군인"을 여론에 집중홍보하여 "시민단체=나쁜넘들"이라는 등식을 어느정도 성립시켜버렸다.
미국도 이쯤되니 반한여론은 쏙 들어가버린다.
그쯤에서 "전투도 안하고 안에만 쳐박혀 있던 한국군"이라고 놀려대던 미국에서 곤잘레스 국무부장관이 "왜 이렇게 효율적인 작전을 펴고 있는 한국군을 우리가 놓치고 있었나?"라며 한마디하자 갑자기 "자이툰식 전술"을 배우자며 여론이 형성되어 버린다.
거기에다가 6자회담에서 일본인 납치문제는 별개라고 미국에서 천명함에 따라 일본인 납치자 문제로 총리가된 아베는 완전 바보되어버리고 아베가 "아~ 이거 아닌데" 하는사이에 미국 하원에서 일본의 과거사(위안부문제) 문제를 들고나온것이다.
일본이 "허걱 당췌 이게 뭐야?"하는사이에 한국은 여기에다가 FTA까지 체결해버린다.

이것으로 일본과 미국의 밀착구도는 깨져버리고 일본대신 한국이 동북아 지역에서 비지니스 파트너로 공식 인정받아 버리게 된다.
다시말해 일본은 따되고 몇개월전만해도 왕따신세였던 한국이 그자리를 차지함에 따라 결론적으로 "동북아 허브"전략의 한걸음을 띄게된것이다.

정말 삼국지가 따로 없는 멋찐 역전에 박수를 보낸다.
2007/04/11 11:10 2007/04/11 11:10
뭐라 말할 수 없을만큼 아쉬운 F-117(F117)은 일반에 공개된 최초의 스텔스 폭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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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스란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레이더의 반사면적을 최소화하여 레이더가 그것이 항공기라고 판단하지 못하도록하는 기술이다.
F-117이 이제 퇴역된데는 미국이란 부자 나라의 결정이지만 이기종이 데뷰한 1989년 파나마 전쟁부터 2007년 현재까지 참가한 전쟁만해도 파나마, 1차걸프전, 코소보내전, 아프카니스탄전쟁, 2차걸프전 등 5개의 전쟁에서 단 1대의 추락만 있었을 뿐일 정도로 생존성이 우수하다. (그 한대도 재수 더럽게 없어서 추락당했지만 말이다. 말로는 격추시켰다고 하지만 기계고장으로 추락한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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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당시로써는 엄청난 방향을 일으켰는데 방공담당들은 "스텔스 공포증"까지 생겼으리라 더군다나 북한의 예만 보더라도 북한과의 문제가 생기면 1980년대까지만해도 항공모함을 중심으로한 기동함대가 동해상에 떴지만 이제는 간단히 스텔스 1개 대대정도 와서 무력시위할 정도이니 1개 기동함대를 대체하는 엄청난 위력이었던것은 분명하다.
그때마다 북한이 "아~ 왜그래? 말로하자니까~"하며 뒤로 뺀걸 보면 이제 이 낯익은 녀석을 볼수 없다는것이 아쉽다.

스텔스라는 것은 사실 따져보면 엄청나게 오래된 기술이다.
최초의 시도는 독일의 U-보트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잠수기술의 한계로 수상으로 이동하다가 전투에 들어가면 잠수하는 정도였고 레이더기술의 선진국인 영국에서는 카타리나와 같은 수색 항공기에 레이더를 달아 잠수함을 미리 탐지하자 스텔스 도료로 잠수함을 칠한데서 시작되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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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전쟁말기 독일의 폭격기인 Ho IX를 만들며 레이더 반사면적을 줄이고 전파 흡수 도료를 바르다 전쟁이 끝난다.
* 제작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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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보관되어 있는 모습. 아무리봐도 B-2 폭격기의 할아버지 정도 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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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전쟁은 끝났고 그것을 선점한것은 미국이었다.
그렇게 잊혀지는 듯했던 스텔스 기술은 베트남전에서 다시 등장한다.
Q2 드론 정찰기는 알루미늄과 같은 금속 외피가 아닌 천을 덮고 베트남상공을 비행했다고 한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D21은 스텔스 도료를 발랐다.
* Q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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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히드의 D-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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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1970년대 드디어 유인 항공기에 전파 흡수 도료를 도배하는데 그것이 SR-71이다.
(사실상 가장 오래된 스텔스 실용기는 SR-71이다)
* D-21을 테스트를 위해 상부에 태우고 비행하는 SR-7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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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로 F-117, B-2, F-22, F-35 등과 같은 스텔스 유인 전투기가 나온것은 다들 아시는 이야기일테고 그것보다 시도만 하다 포기한 것들도 있다.

* 스텔스에다가 음속 7에 도전했던 B58 테스트기 제작만으로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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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해군에 제안되었던 A-12 AvengerII 이놈도 시제기 제작만으로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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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스텔스 기술에 대해 얕은 지식을 풀어 보았다. 정말 오랜 시간 이어져온 기술이다.
1940년대에 개발되다만 기술을 그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미국도 대단한 나라이다.
최고의 스텔스기는 앞으로 F-22에게 내어주었지만 이런 명작이 나오는데 들어간 눈물과 땀, 막대한 자금. 그리고 그 뒤에서 기술적 토대가 되었던 수많은 테스트기체들을 생각하면 명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세삼 느끼게 되는 이야기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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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정리하고 보니 스텔스기는 거의  록히드 마틴사의 제품이다!!
SR-71 : 록히드 마틴
F-117 : 록히드 마틴
F-22 : 록히드 마틴
F-35 : 록히드 마틴
B-2 : 노스롭그루먼사
2007/03/22 10:51 2007/03/22 10:51

Animation의 유키카제가 아니라 실존 했던 강력한 행운의 함 유키카제입니다.

1940년 1월 21일. 사세보(佐世保) 해군공창에서 카게로급 구축함의 제8번함 - 연합함대의 전설, 아니 신화적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그녀, 유키카제(雪風)가 태어납니다.

태어난 직후, 유키카제는 일본해군 수뢰전대의 명문이자 함대함 전투에서는 불패라는 제2수뢰전대(대략 아시다시피, 태평양의 거의 모든 해전에 출동한 함대자 뇌격전에 있어서는 세계최강)에 배치되었고 이후 이 함대 소속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여합니다. 육군의 남방작전을 지원하는 호위임무에 투입된 것을 시작으로 스라바야 해전에서 연합국 구축함 2척과 순양함 1척을 공동격침하며 자바 해협의 연합군 잠수함 소탕작전 시에는 잠수함 1척 격침 등으로 화려한 데뷔를 시작합니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인 1942년 7월 14일에는 나구모 중장 휘하 제3함대 10전대에 배속되어 솔로몬 (이슬로 사라지는 솔로몬, 덜덜덜) 방면으로 진출. 다시 항모전인 남부 솔로몬 해전, 산타크루즈 해전에 호위로 참가, 함대전인 과달카날 해전에서는 공동으로 미 순양함 애틀란트, 주노 및 구축함 4척을 격침시키고 나머지 함에게 다대한 피해를 입히는 전공을 올립니다.

1943년 2월 이후, 주로 수송임무에 종사하게 된 유키카제는 이 사이를 즈음해 드디어 불침함으로 인정받기 시작합니다. 과달카날 철수작전을 무사히 성사시킨 이후, B-17의 공격으로 수송선 모두가 가라앉고 호위함 절반이 이상이 격침된 비스마르크 해전에서 무사히 살아남는 것을 시작으로, 1943년 7월 제2수뢰전대로 복귀힌 콜롬방가라 해전에서 기함 진츠(神通)의 격침에도 불구하고, 자함대의 승리를 이끄는데 큰 공헌을 하게 되지요.

이후에도 여타작전 및 수송선단 호위에 쉴새 없이 투입된 유키카제는 다시 마리나아 해전에 참전할 예정이어으나 기관고장으로 다시 유조선단의 호위를 맡아 미 잠수함과의 격전 끝에 유조선단을 무사히 귀환시킵니다. 연합함대의 마지막 도박이었던 레이테 해전에서도 티끌하나 다치지 않고 돌아온 유키카제는 시나노 호위임무에도 투입되었다 다시 야마토 특공, 기쿠스이(菊水) 작전에서는 피탄된 로켓이 불발이라 살아남고, 기뢰에 접촉하고도 다른 구축함이 피해를 받아서 살고 (-_-) 미 항공대의 처절한 공습 가운데서도 무사히 살아돌아오는 기적을 발휘합니다.

그녀는 연합함대 내에서도 기적의 배이자, ‘절대 가라앉을 수 없는’ 불침함으로 그 명성을 높이게 됩니다. 유키카제는 참전 이래 제1대 토비다 켄지로(飛田 健二郞) 대좌, 제2대 스가마 요시키치(管間 良吉) 대좌. 제3대 데라우치 마사미치(寺內 正道) 대좌, 제4대 코요 케이지(古要 桂次) 중좌에 이르는 역대함장을 거치며 124,800 마일에 이르는 머나먼 전장을 항해하는 동안, 260여명의 승무원 가운데 단 2명의 전사자만을 내었으며 유키카제의 승무원들은 친척이나 자기 자녀가 태어나면 반드시 그 이름에 유키카제(雪風)의 유키(雪)자를 넣어 지었다고 하는군요.

물론 유키카제도 단순한 행운만으로 그 격전의 장소를 버텨온 것은 아닙니다. 역대 함장 가운데서도 가장 호걸로 유명한 데라우치 함장이 직접 함교 밖으로 나서 병사들과 함께 지휘에 임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국수 작전에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국수 문장을 그리려 하자

“전장에 나가서 돌아오지 않는 창피한 역사는 이 유키카제에 없다. 우리 유키카제는 지옥에 떨어져도 다시 돌아온다!!” (아~ 시바 감동감동 T_T)고 화내며 국수 문장을 그리지 못하게 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일본해군에서 구축함은 군함으로 취급하지 않고 별도의 함선으로 분류하며 함수에 일본함선 특유의 국화 장식을 붙이지 않지요)    

병사들의 생존률이 높아, 유키카제는 승무원들이 베테랑 병사들로만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전과를 인정받아 당시 최신예 장비인 레이더 역탐지기, 대공용 제13호 레이더, 사격용 제23호 레이더, 수중탐지용 소나인 3식탐신의(探信儀)를 최초로 장비한, 첨단의 함선이기도 했습니다. 폭탄 30여발, 어뢰 15발 이상을 얻어맞고 격침된 야마토에서 불과 1.5km 밖에 떨어지지 않고 역시 집중공격을 받은 유키카제가 교모히 공습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한 행운이라고 보기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대략 유키카제의 분위기는 마음대로 마작을 하거나, 돌아댕기는 제국해군에 부끄러운 군기를 자랑했다고 하는군요)

야마토 특공 이후, B-29의 공습에 대해 항구에 정박하여 반격을 하던 유키카제는 이후로도 단 1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 8월 15일 일본패전을 맞습니다.

1947년까지 무장을 철거하고 복원함으로 활동하던 유키카제는 그해 5월, 연합국으로부터 최우수함(Best Ship)의 표창을 받고 보상함으로 인계된 유키카제는 본래 미국으로 건너갈 예정이었으나 미국이 그녀를 중화민국에 양도함으로서 중화민국의 기함 단양으로 새로 태어나게 됩니다.

1947년 7월 6일, 일본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떠난 유키카제는 더 이상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으나 연합군으로부터 “이토록 잘 정돈된 함은 본 적이 없다.”는 칭송을 듣고 국민당 정부의 대만퇴각에도 활약, 1966년 태풍으로 해체될 때까지 활약해온 그녀 유키카제는 마지막 기함이며 핵실험에 홀로 가라앉은 나가토(長門)와 함께 연합함대의 마지막 함선으로 기록되었습니다.(Wiki 백과사전에는 대만에서 丹陽(붉은태양)이라는 이름으로 활약한후 1966년 태풍에 의해 손상되었고 1970년 Scrapped, 해체되어 운명을 마감했다고 되어있다.)

아쉽게도 사진 많지 않군요. 프라모델로 대체하는 센스...

어떻게 보면 군인으로써 유키카제의 함장들은 정말 행운아 입니다. 3대의 함장을 거치는 동안 잃은 부하가 겨우 2명. 현대의 대량 학살전에서 계속 도망만 다닌다고 해도 불가능에 가까운 기적을 일으킨 유키카제함에 경의를 보냅니다.

어찌보면 이녀석의 모티브가 유키카제 아닐런지?
한국어 더빙판에서는 "산들바람호" 다시말해 바람을 뜻하는 "카제"라는 이름에서.. 그리고 그 옛날 전설함 유키카제의 함풍과 이녀석들의 사는 모습이 어찌보면 비슷하기도 합니다.
2007/01/22 10:57 2007/01/22 10:57
흔히들 3차 중동전쟁은 시리아의 공격에 영광스러운 이스라엘의 반격으로 시작된 전쟁이라 정사에는 쓰여져 있다. 그러나 진실에 접근하기위한 단초를 오늘 쓰려한다. (3차 중동전쟁을 쓰기전에...)

1967년 6월 4일 이스라엘,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간의 전쟁에서 떠다니던 전파정보를 수집하기위해 USS 리버티호가 투입된다. 원래 이함선은 2차대전당시 수송함으로 NSA(National Security Agency)의 '기술조사선'으로 분류된 정보수집선으로 개조된 상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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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맹 미국의 배를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견제하는 정도였다. 가끔 승무원들이 손흔들어주면 조종사도 같이 흔들어주는 그런 형편이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6월 8일 이스라엘 전투기가 로켓포와 네이팜으로 이배를 두들겼고 근해에 있던 이스라엘 어뢰정이 어뢰공격을 개시하여 약 1시간의 공격을 받았다.
물론 응급 구조신호를 보냈지만 이스라엘의 전파 방해로 통신도 되지 않았으며 겨우 연락이 닿은 근처의 사라토가 항공모함에서는 전투기가 긴급발진하였지만 위로부터의 철수 명령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배는 침몰하였고 승무원 292명중 34명이 전사, 171명 부상을 입었다. 어뢰공격으로 콘솔룸이 날아가며 24명이 즉사했던것이 가장큰 타격이었다.
사건 16시간후 구축함이 도착하여 조난 승무원을 구출하였고 이사건은 이스라엘 오인공격에 의한 것으로발표났고 이스라엘은 600만 달러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종결되었다.
더웃기는 것은 미국 당국의 발표로 6분간의 이스라엘 오인사격으로 10명의 수병이 전사했다고 거짓 발표한것이다.
최근 공개된 CIA내부보고서에는 모세다얀의 명령으로 격침시켰다는것을 지적하고 있다.
도대체 리버티호는 무엇을 알고 있었을까?

아마도 이스라엘의 세간에는 알려지지 않은 더러운 의도와 짓거리를 알고 있었을것이란 추측만 난무하고 있다.
(6일전쟁의 결과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을 차지한 이스라엘. 우쭐우쭐~ ㅡㅡ;;)
2006/08/10 16:25 2006/08/10 16:25

1978년 2월 「키프로스」에서 이집트 대통령(당시)「사다트」의 절친한 친구 한명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30명의 인질을 잡고 키프로스 정부로부터 DC-8 여객기 한대를 뜯어낸 암살범 두명은 인질 18명과 함께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 했지만 근처 어느나라도 이들의 비행기를 착륙하게 놔두지 않았다.
결국 지중해를 빙빙 돌다 키프로스의 「니코시아」로 되돌아간 범인들은 키프로스 정부와 지루한 협상을 시작했다. 지루한 협상이 슬슬 타협점을 찾아가던 그날 밤, 한대의 C-130수송기가 니코시아 국제공항 활주로에 날아들었다. 45명의 이집트군 특공대 「사이카:번개」부대를 태운 이집트 공군 수송기였다.

투철한 복수심에 불타는 이들 사이카대원들은 인질을 구출하고 범인들을 처치하기 위해 DC-8기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키프로스당국과 전혀 협의가 없었고 이집트군이 탑승한 수송기의 착륙조차 허락을 받지 않았다. 당장 키프로스군과 경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키프로스군과 경찰로서는 아무말도 없이 남의 나라 땅에 뛰어든 이 험악한 친구들은 아무리 봐도 테러리스트들의 일당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원래는 부대 이름마냥 `번개처럼` 끝났어야 할 구출작전은 RPG-7과 중기관총이 난무하는 `전면전`으로 변해버렸다. 이집트군의 C-130이 RPG-7에 맞아 불타올랐고, 곳곳에서 비명과 신음소리가 울려퍼지는 생지옥이 펼쳐졌다.

간신히 전투가 끝난 뒤 15명의 이집트군 특공대원의 시체가 활주로에 뒹굴고 있었고, DC-8기내에도 인질 모두의 시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범인 두 명은 키프로스 정부에 항복했고 나머지 이집트 특공대원도 전부 키프로스군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이집트판 엔테베의 기적`을 바라던 이집트군의 야망은 아주 보기좋게
짓밟혔지만 이걸 보는 세계 각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집트 정부는 간신히 석방되어 돌아온 대원들을 영웅으로 대접하는 한편 키프로스정부를 피도 눈물도 국제협력도 모르는 악당으로 몰아붙이면서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 했지만 누가 봐도 이집트가 잘못한 건 확실했다 여기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막 미국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이집트를 자극하기 싫었고 결국 명백히 실패인 이 작전을`테러리스트와 타협하지 않은 용기있는 행동`정도로 평가해 이집트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 애썼다.

누가 봐도 대테러작전의 아마추어인 이집트군 특수부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이카부대를 777부대로 개편하고 미국 SEAL 6팀이나 델타포스, GIGN, SAS같은 쟁쟁한 각국 대테러부대에서 교관을 초빙해 훈련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최고의 교관들을 초빙하고 훈련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특수부대에 관한 평가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그 유명한 전직 SEAL 대원이자 초대 SEAL 6팀 대장 「리처드 마친코」는 저서 「로그 워리어」를 통해 "이곳 장교들은 여전히 아랍귀족들처럼 모든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맡긴 채 손 하나 까딱 안하려 한다"며 777부대를 혹평했고, 다른 나라 교관들로부터의 평가도 결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장비에도 상당한 비용이 투자되고 실력이 꽤 좋아졌다고 여겨지던 1985년 10월, 마침내 이들이 정말 실력을 쌓았는지 검증할 기회가 왔다.

1985년 10월 110여명의 승객을 태운 이집트 항공 소속 보잉 737기가 지중해의 섬나라 「말타」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했다. 이번에야말로 7년전의 굴욕을 갚아보겠다고 벼른 777부대는 당장 말타로 향했다. 이번에는 이집트정부도 7년전보다 똑똑해져서 말타정부에 회유반 협박반으로 설득을 거듭한 끝에 777부대가 말타에서 구출작전을 벌여도 좋다는 허락이 간신히 떨어졌다.

777부대원들은 기체를 포위하고 곳곳에 도청장치를 붙이는 동시에 석방된 몇몇 승객들로부터 기체 내부의 정보를 얻는다는 고전적인 순서부터 작전을 시작했다. 적어도 시작은 이처럼 지극히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이었지만 충분한 정보, 심지어 보잉 737기의 기내구조마저 제대로 파악하기 전(자기네 항공사의 여객기임에도 불구하고 777부대는 보잉 737기의 내부구조에 대한 사전지식이 거의 없었다)에 구출작전 개시명령이 떨어졌다.

이집트 정부가 777부대에 빨리 작전을 끝내서 인질을 구출하라는 압력을 계속 넣었고 777부대장도 자신했기
때문이었을까? 777부대는 테러리스트의 숫자나 위치, 인질의 위치나 상태 등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둠을 틈타 작전을 시작했다. 이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테러리스트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기체 위에 폭탄으로 구멍을 뚫은 사이에 날개 옆의 비상구를 폭파하고 부대가 돌입한다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별로 나쁘지 않은 계획이지만 문제는 기체 위에 테러리스트들 몰래 폭약을 설치한 것은 좋았는데 구멍을 확실하게 뚫는답시고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폭약을 붙여버린 것이다. 엄청난 폭약과 함께 기체 위에는 큼직한 구멍이 뚫렸고, 그 바로 밑에 있던 인질 20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당연히 기내는 엄청난 연기와 폭음, 먼지에 휩싸였고 이게 가라앉을때까지 기다린답시고 90초나 돌입을 미루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돌입한 777부대는 또한번 엄청난 짓을 저질러 버렸다.
기내에 대인살상용 파편수류탄을 던지며 돌입한 것이다.

순식간에 기내는 피로 물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777부대는 기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에 사격을 퍼부었다-누가 인질이고 테러리스트인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기내를 몇몇 승객이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들을 향해 가차없이 총탄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들을 쏜 것은 어이없게도 이집트군 스나이퍼였다. 여객기 밖으로 뛰어나온 인질과 테러리스트를 구분할 생각도 없이 무차별 사격을 퍼부어 버린 것이다. 이미 사태는 `실패한 구출작전`의 단계를 넘어 `무차별 학살극`이 되어가고 있었다.

간신히 연기가 걷히고 총성이 잦아든 다음 모두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실패라는 말조차 과분한 참담한
상황이었다. 활주로와 기내에 뒹굴고 있는 인질의 시체는 57구-인질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고 부상자까지 합치면 인명피해는 90여명-거의 모든 인질이 죽거나 다쳤다.

구출작전이 아니라 숫제 인간사냥을 한 것같은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더 어처구니없게 만든 것은 이집트 정부와 미국의 태도였다. 이집트는 이 작전을 `성공`했다고 평가했고, 미국 정부는 이번에도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추켜세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후 이집트정부에 대해 인질극을 벌이려는 세력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2006/07/22 05:15 2006/07/22 05:15

이라크 최대 전투였던 팔루자에서의 어느 해병의 지친얼굴...

그는 팔루자 전투에서 살아남았고 제대한후 돈이 없었지만 네티즌들의 후원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잠시뿐... 결국 파경에 이르렀고 그의 전쟁의 상처는 평생 안고 살아가야할 그런 상처이다.

2차 세계대전이후로 명예로운 전쟁이 있을까? 아마도 한국전쟁이 유일하지 않을까 싶다.
미군의 2차대전 이후 전쟁사를 보면 한국전, 월남전, 파나마, 코소보, 이라크 1차, 2차등..
결국 정의란것은 월남전의 패전으로 사라졌고 적이 없는 미국은 폭주하여 실리만 챙긴다.
그 상처는 결국 자국민을 향하는구나.

2006/07/21 12:17 2006/07/21 12:17

2000년전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변치 않는 인간의 행위가 있는데 "먹고","입고","싸고","자고","번식하고","싸운다"입니다.

먹는 것은 외식업으로 각종 먹거리 사업으로 발전하였고 입는것도 각종 의류 사업으로 싸는것 역시 각종 오폐수 수거 사업에서부터 요업, 화장실 변기 사업으로 자는 것은 건축업으로 번식은 결혼중개, 싸움은 군대로 발전해왔을 뿐인것이죠.

이제 하나씩 뒤벼 볼까요?
첫째, 병력의 숫자보다는 일시에 많은 화력을 퍼붓는 쪽이 이긴다. 즉, 진형의 표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이길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장은 점과 점이 만나서 생기는 것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 변치 않는 특징. 단지 변한것은 무기의 사거리 변화로 거리가 늘어난것 밖에 없죠.
이 그림을 보면 명확해집니다. 아무리 많은 군대라 해도 적과의 접점에 있는 병사의 수는 정해져 있고 그 뒤에 있는 병사들은 앞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알고자해도 알수가 없습니다. 즉, 뒤에 있는 병사들이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은 전무하고 최전방에서만 화력을 주고받는 형태이므로 접점의 병사수가 많은 쪽이 이길 확률이 높아 지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A군 10명 B군 8명이 싸운다고 치고 명중률은 50%로 같다고 합시다.
첫번째 교전에서 A군 10명이 B군 5명을 살상하고 B군 8명은 A군 4명을 살상합니다.
그럼 남은 병사는 A군 6명 B군 3명입니다.
두번째 교전에서 A군은 B군을 전멸시키고 B군은 1.5명을 살상하여 A군은 4.5명이 남습니다.
결국 2명의 차이로 시작한 전투는 최후에는 4.5명 (0.5 맞은 병사 후에 전사로 4명)의 차이를 내게 됩니다.
1967년 극적인 짜빈동 전투를 예를 들면 1개 중대에 1개 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주공은 북서이며 동남쪽에서 양동 그리고 나머지 지역에서의 도발이 있었다는 것을 사상자 분포도를 통해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1개 중대가 방어하는 방어진지의 승.
포병을 비롯한 압도적인 화력의 승리였습니다.

둘째, 정보를 장악하는 쪽이 이긴다.

독일군은 에그마라는 작품을 만들어 놓고 이거 전쟁 끝날때까지 그대로 믿고 있다가 연합군의 암호해독 기술에 간파당해 움직임을 다 읽혀 버립니다. 스타크레프트에서 맵핵쓰는것과 같죠.

셋째, 기동성이 우월할 경우 승리의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병력이 수가 적음에도 기동력으로 전장을 승부한 곳이 있었습니다. 근대전쟁의 예로 1940년 벌어진 구소련과 핀란드의 겨울전쟁입니다.
겨울전쟁에서 핀란드는 장작전술로 적의 병력을 "나누고","깬다"라는 개념으로 수많은 현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던 구소련군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눈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전차는 화염병으로 부수고 참호에 틀어박힌 보병은 뛰어난 저격술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봄이 오고 눈이 녹으면서 핀란드군의 자랑이던 기동력에 큰 타격을 입고 결국 항복하였지만 기동력이 화력과 방어력을 압도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넷째,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
현대 제국주의가 물러간 시대에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게 만듭니다. 저 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한때는 자랑스러운 아들딸이었을것이며 무적의 아버지 어머니였을 것이고 누군가가 사랑하던 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꿈을 꾸며 인생을 살아가던 이였겠죠.
2006/04/25 13:29 2006/04/25 1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