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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5/21 글뻥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본 극우
예전에 사무라이는 할복하지 않았다는 글(http://www.wolfpack.pe.kr/34)에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라는 자에 대해 언급한적이 있다.

일본 자위대에 들어가 자위대 건물을 점거하고는 자위대에게 반란을 획책한자이다.
일본 극우의 정신적인 지주이기도한 그는 사실 일본군 병역기피자로 만성 독감으로 군의관을 속여 면제된 경력이 있는자라는 것을 오늘 알았다.

얼마나 일본은 모순된 이성을 지니고 있는지 새삼 깨닿는 기사라고나 할까?

'가미가제' 나라의 병역기피 

프레시안  기사전송 2008-05-20 15:21

[권혁태의 일본 읽기] <11> 병역기피자들의 戰後
[프레시안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아들을 '팔아넘긴' 어머니의 이야기
일본을 대표하는 배우 중에 미쿠니 렌타로(三?連太?, 1923∼ )라는 사람이 있다. '낚시광 일기(釣りバカ日誌)'라는 만화를 원작으로 한 인기 시리즈 영화의 주연배우로 유명한 사람이다. 이 영화는 1988년 처음으로 만들어진 이래, 매년 하나씩 개봉되어 2007년 현재 무려 17번째 편이 만들어졌을 정도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이 작품에서 코믹 연기로 유명한 미쿠니는 폭 넓은 연기와 온화한 성품으로 9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밝고 대중적인 그에게도 전쟁과 전쟁으로 얼룩진 가족사가 역사로 감추어져 있다.
사실 그는 병역 기피 미수범이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943년 다른 사건으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있던 중에 소집영장을 받게 된다. 경찰은 그를 '군대에 보내기 위해' 훈방 조치를 취한다. 하지만 '의미 없이 사람을 죽이거나 죽이기 위한 훈련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그는 일본 열도를 탈출할 계획을 세운다. 조선을 거쳐 중국으로 탈출하려고 했던 그는 일본 열도를 남하해 야마구치(山口) 현의 오고오리(小郡)에서 자신의 탈출 계획을 담은 마지막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낸다.
"나는 도망갈 겁니다. 마을 사람들이 우리 가족들을 '왕따'시키겠지요. 힘이 들 겁니다. 동생들도 앞으로 여러 가지로 고생하겠지요. 그러나 이게 마지막 불효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고 싶어요. 살아남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조선으로 가기 위한 배를 타기 위해 도착한 규슈의 북단 사가(佐賀)현 가라쯔(唐津)라는 곳에서 특별고등경찰에 체포된다. 결국 그는 형무소에 가는 대신, 군대를 가게 된다. 중국 전선으로 떠나기 직전에 면회를 온 어머니는 아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말한다. "아들아, 너에게는 힘든 일이겠지만, 우리 일가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눈물을 머금고 전쟁터에 가주어야 한다."
이 때 그는 왜 자신이 잡히게 되었는지, 그리고 형무소로 가지 않고 왜 군대로 갈 수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가 보낸 편지를 어머니가 경찰에 밀고한 것이다. 말 그대로 아들을 경찰에 '팔아넘긴' 것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중국 전선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그는 말한다. "어머니가 내 편지를 경찰한테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알게 된 다음부터 어머니를 원망한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어머니도 돌아가실 때까지 그 일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으셨지요."
미쿠니 말고도 일본의 유명 인사 중에는 병역 기피자나 거부자가 적지 않다. 일본 근대 소설의 아버지라 불리는 나쯔메 소세키(夏目漱石, 1867-1916)도 징병기피자이다. 그는 홋카이도로 본적을 옮기는 방식으로 징병을 기피했다. 인구가 부족했던 당시 홋카이도에서는 '개척'을 위해 본적지를 옮길 경우 징집이 유예되었다. 하지만 그는 실제로는 홋카이도에 살지 않았다. 일종의 '위장전입'이었던 셈이다. 그가 징병 기피에 성공한 이후, 1898년에 홋카이도에도 징병제가 실시되었다.
또 희극배우로 유명한 반 준사부로(伴淳三?, 1908-1981)는 화장을 짙게 한 여장 차림에 간장을 대량으로 마셔 병역면제 조치를 받았다.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는 독감을 만성병인 것처럼 속여 병역면제를 받았다. 그가 전후에 과도하게 '몸'에 대한 심미적 집착을 보이게 된 것이나, 1970년 자위대 기지에 들어가서 쿠데타를 선동하고 할복자살한 하게 된 것은 병역기피라는 개인사가 배후에서 '반동'으로 작동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방랑 화가로 알려진 야마시타 기요시(山下?, 1922-1971)는 징병 검사 연령 직전에 집을 나와 전국을 방랑하는 형태로 징병에서 벗어났다.
물론 병역 기피 혹은 거부는 일본만의 현상은 아니다.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국에서는 약 57만 명이 징병에 따르지 않았고, 이 중 2만 5000명이 기소되었으며, 9000명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나중에 미국의 대통령이 된 빌 클린턴은 캐나다 유학을 통해 징병을 피했다. 전설적인 복서 무하마드 알리는 이슬람교의 원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해서 챔피언 벨트까지 박탈당했다.

일본의 징병기피의 역사
베네딕트(Ruth Benedict)가 <국화와 칼>(1946)에서 전쟁 중에 나타나는 일본 군인의 과도한 정신주의적 헌신성, '무항복주의'를 일본 사회 고유의 '수치심'(하지, 恥)의 문화에서 찾고 있듯이 '일본군'이라는 단어로부터 우리는 잔인함과 아울러 정신주의, 그리고 맹목적인 충성, 그리고 헌신성을 떠올리게 된다.
가와노 히도시(河野仁)가 2차 세계대전 시의 미군과 일본군의 행동패턴을 비교분석해 미군을 '생환의 군대'로 일본군을 '옥쇄의 군대'로 묘사한 것은 이 때문이다. 미국의 대표적인 일본사 연구자인 존 다워(John W. Dower)는 당시의 미국인에게 일본군은 "이상한 규율과 전투 기술을 가진 일본인 초인(슈퍼맨)"으로 각인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옥쇄', '산화', '가미가제', '집단자결', '할복'이라는 단어는 이 같은 이미지의 대표적인 표상어이다. 이 같은 이미지 때문에 전전 일본 사회에 적지 않은 병역 기피자나 거부자가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징병령이 1873년에 실시되고, 이것이 1927년 병역법이라는 형태로 강화되고, 전쟁이 끝난 후인 1945년 11월 17일에 폐지되기까지 일본에서 병역 기피나 거부는 그다지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초기에는 면제 규정이 폭넓게 운용되고 있었던 탓에 현역 입영율은 10%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후 청일전쟁, 러일전쟁, 만주 침략, 중일전쟁, 태평양 전쟁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이 확대되면서 현역입영률은 대폭 상승하게 되지만, 병역 기피 현상은 별반 새로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1916년-1931년까지의 <육군연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해마다 병역 기피자 및 도망자가 최저 2만 3513명(1931년)에서 최고 4만 4456명(1916)에 달했으며, 징집대상 최고 연령인 만 40세까지 계속 도망하는 자가 매년 평균 1000명 이상이며, 가장 많았을 때는 3447명에 달했다고 한다.
병역 기피나 징병 거부의 양상도 시기에 따라 많이 다르다. 징병령 초기에는 농민이 죽창, 낫 등으로 무장봉기하여 관청을 습격하고 학교, 집회를 방화, 파괴하는 등 메이지 국가권력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자연발생적이면서 대중적 반대운동의 형태를 취한다. 이후 병역기피는 면제규정을 이용한 합법적인 형태를 취하게 되는데, 예를 들면 징병을 대신해 돈(대인료)을 납부하거나 양자 입적, 호적 매매 등 법 조항을 교묘하게 이용해 합법적으로 징병을 기피하는 행위가 일반화된다. 당시에 일종의 유행병적인 사회현상으로 등장하면서 합법적 병역 기피를 교시하는 출판물이 범람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후 메이지 정부가 현역입영율을 높이기 위해 징병 면제 규정을 대폭 삭제하자 병역 기피는 훨씬 은밀화된다. 병역기피자는 정부나 군부는 물론 일반국민으로부터 '국적(國賊)' 또는 '비국민(非國民)'으로 불리면서 헌병이나 경찰로부터 지속적인 추적을 받게 된다. 따라서 병역기피자는 도망, 실종, 신체훼손, 계획적인 사기에 의한 꾀병 등 징병회피를 위해 목숨을 담보로 한 방식이 주류를 이룬다. 따라서 이 시기의 특징은 개인적, 폐쇄적 환경 속에서 홀로 생명의 위험과 권력의 추적을 의식하면서 이루어진 고립적인 형태로 진행되게 된다. 이 시기에 주로 사용했던 '신체훼손'에 의한 병역기피의 방식을 경찰 쪽 문서(1921년)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도수가 높은 안경을 사용해서 고도 근시가 되는 자, 아무 이상 없는 눈을 근시처럼 안 보인다고 하는 자, 눈에 자극적인 물질을 넣어 안구를 충혈 시키는 자, 검사 전날 밤 수면을 취하지 않아 눈을 충혈시켜 눈병이 있는 것처럼 하는 자, 귀속 깊숙이 콩을 넣는 자, 고막에 깃털을 넣어 청력에 이상을 일으키는 자, 이를 일부러 빼는 자, 간장을 마셔 심장 박동을 높여 심장병이 있는 것처럼 주장하는 자, 검사 전부터 단식해 몸을 쇠약하게 만드는 자, 손가락을 절단하는 자"
물론 병역기피 등이 드러날 경우 징벌은 무거웠다. 1927년에 강화된 병역법에 따르면, 병역을 피하기 위해 도망 혹은 신체를 훼손시키거나 꾀병을 부리는 자는 징역 3년 이하(74조), 현역입영예정자가 10일 이내에 입영하지 않을 경우에는 6개월 이하의 금고형에 처하게 되어 있었다(75조). 하지만 실제로 이런 규정이 그대로 적용된 것 같지는 않다. 위에서 언급한 미쿠니의 사례가 이를 잘 말해준다. 병역법 규정대로라면 미쿠니는 적어도 3년 이하의 징역형에 처해져야 한다. 그럼에도 징역형 대신에 입대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 같은 사례는 적극적인 병역거부자에게서도 발견된다. 일본의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종교적인 이유와 사상적인 이유로 대별되는데, 필자가 여러 자료를 통해 확인한 결과,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서 처벌이 그다지 무겁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 양심적 병역거부자 1호로 기록되는 야베 키요시(矢部喜好, 1884-1935)는 러일전쟁 시대인 1905년에 병역거부를 하지만 금고형 2개월의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무교회주의자인 반전 문학자로 알려진 이시가 오사무(石賀修, 1910년- )는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었던 1943년에 병역거부를 실행에 옮기지만 4개월 구속 후 벌금형에 처해졌다. 톨스토이의 영향을 받아 1922년에 군적을 이탈한 스다 기요모토(須田?本)의 경우는 처벌을 받은 흔적을 확인할 수 없다.

징병기피자의 전후(戰後)
그렇다고 한다면, 병역 기피자의 전후는 어떠했을까? 1945년 11월에 일본군대는 해체되었다. 그리고 도쿄재판에서 적어도 1931년 이후의 일본의 전쟁은 잘못된 것으로 국제적인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약 1000명의 전범이 사형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렇다고 한다면, 침략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거부한, 혹은 동원되는 것으로부터 도망간 병역 기피자나 거부자가 전후 생활 속에서 영웅대접까지는 아니더라도 '왕따' 취급은 받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일본의 전쟁은 잘못된 것이니, 잘못된 전쟁에 동원되는 것을 의식적으로 거부하거나 피한 사람들의 선택은 비겁한 것이 아니라 현명하고 용기 있는 선택이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병역기피자의 전후는 병역기피자의 전전과 전후를 상호 교차적으로 다루고 있는 마루야 사이이치(丸谷才一, 1925∼ )의 소설<사마쿠라(笹まくら)>(1967년)를 통해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이 작품으로 마루야는 가와데(河出)문화상을 수상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은 위에서 말한 미쿠니 렌타로가 모델이라고도 하지만 오히려 화가 야마시타 기요시의 방랑을 통한 병역기피에 가깝다. 작가인 마루야 자신은 1945년에 군대에 가서 살아 돌아왔으니 작가 자신이 모델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줄거리는 이렇다.

1960년대 중반 사립대학의 서무과 직원은 병역기피의 과거를 지니고 있다. 1940년 그는 "죽는 게 싫어서, 혹은 죽이는 게 싫어서" 소집영장(아카가미, 赤紙)을 받고 입대를 하루 앞둔 저녁에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고 집을 나온다. 원래 공업고등학교 출신인 그는 라디오를 고쳐주는 일을 하거나 아이들을 상대로 모래로 그림을 그려주는 '스나에시(砂?師)'를 하면서 전국을 5년 동안 방랑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방랑이 아니라 병역기피이고, 거부인 셈이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다. 그는 당연히 일상으로 복귀해야 한다.
하지만 그는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에 시달린다. 그가 도망 다닐 때에 어머니는 자살했고, 남동생은 병역기피자인 형 때문에 경찰에게 맞아 고막이 터져 평생을 청각장애인으로 살게 되었다. 군대로 간 절친한 친구는 군대에서 자살했다. 그래서 그는 대기업 취직을 마다하고 아주 조용하고 은밀하게 그리고 비정치적으로 전후를 살고자 한다. 그래서 택한 곳이 사립대학 서무과 직원이다. 하지만 이 대학은 일본의 '국가 신토(神道)'의 영향이 아주 강한 우익적인 대학이다. 예를 들면 대학 정문 한 옆에는 신전(神殿)이 있는데, 대학을 출입하는 대학 관계자는 반드시 신전을 향해 목례를 해야 한다. 그는 다른 좌파 교수나 학생들과는 달리 반드시 이 신전에서 목례를 한다. 그에게는 병역기피라는 과거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항상 불안한 것이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의 일본에 다시 국가주의의 바람이 서서히 불기 시작한다. 그렇게 조용하게 살려 했던 그에게도 국가주의의 바람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면서 그가 하는 행동 하나 하나를 주위에서 병역기피의 과거와 연결지려는 시선이 강해진다. 승진을 앞둔 그는 시골 학교로의 좌천을 통보받는다. 물론 병역기피라는 과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일본이 다시 병역 기피자를 잡으려 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는 다시 탈출=기피를 꿈꾼다. 다시 전국 방랑을 꿈꾸는 것이다.
'사사마쿠라'란 일본의 옛 시가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것인데, 우리말로는 '대나무 밭의 베개'라고 번역할 수 있다. 대나무 밭에서 대나무를 베개로 삼고 눕게 되면, 죽순 때문에 편안한 잠을 잘 수 없다. 즉 불편하고 불안한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병역기피자인 그에게 도망 다니던 시절의 불안하고 불편한 심리를 나타내는 말이다. 문제는 이 같은 불안한 심리가 전전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조심조심 전후를 살아왔지만, 결국 다시 병역기피라는 과거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에게 '사사마쿠라'로 표현되는 병역기피자의 불안은 계속되는 것이다.
작가 마루야의 시선은 당시의 역사학이나 사회과학이 간과했던 중요한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당시의 역사학이나 사회과학, 그리고 일반 사람조차도 전전의 어두운 시절은 1945년 8월 18일로 끝났으며, 그 날부터 시작되는 전후는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의 밝은 시대였다는 소위 단절론적인 역사관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루야는 전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통해 전후 평화주의와 민주주의의 허구성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1945년 이전에 일본 군국주의로부터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나 집단이 전후에 와서 명예회복, 손해배상, 진상규명을 국가에 요구한 사례는 없다. 유일하게 있다고 한다면, 1942년에 중앙공론(中央公論), 개조사(改造), 아사히(朝日) 신문 관계자 약 60명이 체포되고 30명이 기소되었으며, 이 중 4명이 옥사한 요코하마(?浜) 사건이 유일하다. 2005년 이 사건 관계자와 가족들이 재심을 청구한 것이다.
결국 '주어진 민주주의'와 '쟁취한 민주주의'의 차이일지 모른다. 이것이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의 한계인 것이다. 마루야가 이 작품을 썼던 1960년대보다 훨씬 '과거 회귀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요즘, '사사마쿠라'는 적어도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의 가장 절실한 심리상태일 것이다.
권혁태/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anotherway@pressian.com)

2008/05/21 13:25 2008/05/21 1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