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전방 5개사단과 후방 5개 사단을 합쳐 10개 사단으로 남침하였다.
최전방에 2차대전때 한끗발 날리던 T-34/85 전차와 Su-100 자주포등을 동원한 전형적인 구소련식 기동전술을 구사했고 중국에서 항일전쟁하던 조선의용군 출신의 명장들로 인하여 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우리의 텔레토비 조상들의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원래 김일성이 원하는 것은 2차대전 개전 이전에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때와 같이 수도인 "빈"으로 부우우웅~ 하고 들어가 합병 찬반투표하고 담날 압도적인 찬성표인 99.7%로 합병했던 그 사건을 그대로 벤치마킹하여 수도 "서울"로 부우우웅~ 들어가 국회의원들 모아 놓고 김일성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는 계획이었던것 같다.
(당시는 대통령 간접선출방식이었다. 대통령 직선제 된지 얼마안된다. 기억하자)
(이것도 엄청 계산된 결과인듯하다 2대 국회 임기가 1950년 5월 31일. 전국에서 짐 정리해 국회 근처로 이사와서 정상적인 근무가 가능한 때를 한 3주후로 잡았던것 같다.)

*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는 즐겁게(?) 독일에 합병되었다. 이것을 벤치마킹한 우리의 김일성 아저씨는 즐거운 상상을 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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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암튼 3일동안 장갑차 몇대 있는 한국군을 빗자루 쓸듯이 흩어버리고 서울입성에는 성공했으나...

*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의 T-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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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상상속에서 필수적이었던 우리의 2대 텔레토비님들이 모두 몸을 숨겨 버린것이다!!! 그덕에 정족수 부족으로 국회를 개회할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였고 벼룩처럼 다 튀어버린 국회의원들을 찾아 서울에서 다시 3일을 보낸다.
결국 김일성이 꿈꾸던 평화적(?) 공산화는 실패하였고 3일간의 남하중지가 무엇때문이었는지 미스터리한 일로 전사에 기록되었었다.
(혹자는 한강방어선의 성공적 방어라 하지만 독일도 못막아낸 T-34러쉬를 무슨 수로 막아낸단 말인가?)
그때문에 맥아더 사령관의 한강방어선 시찰이 이루어지고 이 시찰로 인하여 미군의 참여가 결정되는 전쟁의 방향을 틀어버린 계기가 되었다.(인천상륙작전도 이때 구상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당시에 텔레토비님들께서 용감히 출근하였다면 어떻게 역사는 바뀌었을까?

* 첨언 - 원래 북한군의 군사 계획은 이러하다. 서울까지 두두두~ 달려서 점령하면 춘천/홍천의 우회침투로를 돌아돌아 수원을 거쳐 한강이남에 방어진을 친 국군을 포위섬멸하여 하였다. 그간 3일의 지체사유는 전사의 최대 미스터리사건이며 6사단의 춘천/홍천 방어전의 승리가 바로 이러한 3일간의 시간을 벌었다는것이 정설처럼 통했다.
그러나, 이는 기동전의 기본원리를 깡그리 무시한 설이다.
롬멜의 7사단이 그러했듯 패튼의 3군단이 그러했듯 한번 가속도가 붙은 기갑사단은 세우는 것이아니다. 세우는 것 자체가 기동에 의한 충격력을 0로 만드는 것으로 이는 자살행위이다.
다시말해 한번 시동건 기갑부대는 뒤에서 원자탄이 터지든 좌우측의 날개가 날아가든 무조건 달려서 종심 깊숙히 박혀 들어가는 창이 되어야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때문에 기갑부대는 최고지휘관이 최선두에서 지휘한다. 왜? 상황이 매번 변하기때문에 상황판단을 하여 무조건 달려나가기위함이다. 춘천을 돌아 수원에서 똥침날리기로 된 부대가 제시간에 도착못했다면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기갑부대는 차선을 즉시 선택하여 한강을 도하해 도보로 철수하는 국군을 섬멸했어야 정상이라는 이야기다.
모양새가 마치 덩케르크 철수 작전 직전의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영국이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는 지례짐작으로 구데리안의 진격을 승인하지 않았고 이덕에 34만 대군이 영국으로 멀쩡히 돌아갔고 이 군대는 몇 년 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32만이 다시 돌아온 덕에 게임 오바되버렸다.
이와 같이 생각해보면 김일성은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같이 단기간에 끝장보려 했을것이라는 판단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2007/08/28 09:28 2007/08/28 0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