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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민초운동이 이룬 ‘위안부 美의회 결의안’ (헤롤드 생생뉴스)
美하원 위안부결의안 압도적 다수 통과 (연합뉴스)
숨가쁜 ''막후 외교전''… 日 눌렀다 (세계일보)
미하원 외교위, 성노예 결의안 압도적 통과 (조선일보)
위안부 결의안 채택…일본 정부 '내심 곤혹' (SBS)

등등등 각종언론에서 6월 27일 내보낸 기사의 타이틀들이다.
본 법안이 생기면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조사를 해봤다.

1999년 켈리포니아 주의회의 일본계 3세 혼다의원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하여 일본정부에게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 혼다결의안을 발의하였다.
이때만해도 그리 알려진 이슈가 될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본계인사들의 공분을 샀고 엄청나게 거센 압박이 왔다고 한다.
그때 혼다의원은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고 김영옥 예비역 대령을 찾아간다.
2차대전 일본계 참전용사회를 이끌던 김영옥 대령은 혼다의원의 이야기를 듣고 참전용사회의 회원들에게 지지서명을 받아 혼다의원에게 전달했다.
혼다의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2차대전 "일본계 참전용사회"의 지지 서명으로 일본계 내부의 의견은 뚜렸해진것이다.
그리고 8년후인 2007년 6월 26일 일본의 거센반발과 WP지에 자기변명과 미국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을 하는 패착으로 혼다 의원의 결의안은 하원을 통과했다.

그럼 과연 2차대전 참전용사회는 무엇이며 김영옥 대령은 누구이길레 일본계 이민자사회의 목소리를 한방에 잠재울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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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생이신 고 김영옥 대령은 LA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김순덕님과 노라 고님사이에 태어나셨고 1939년 육군 모병소로 찾아갔으나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941년 아시아계도 받아 주게 법령이 정비됨에 따라 그는 사병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계 이민자들을 사막의 수용소로 집어 넣었고 일본계 이민자들은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달라고 탄원하는 등 속칭 "니세이 부대" 100대대가 창설되게 되었다.
*훈련받을때의 100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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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100대대는 442연대 1대대로 다시 구성된다.
당시 젊은 김영옥은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장교후보생으로 교육받았고 임관후 이곳 442연대 1대대로 전입오게 된다.
대대장은 김영옥에게 한국계와 일본계가 사이가 좋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인이 자신들을 지휘하는것에 대해 사병들이 문제를 일으킬것을 우려하여 다른 부대로 전출을 제의하였지만 "우리는 미국인이며 같은이유로 싸우려 할뿐입니다"라며 Bravo중대 2소대장으로 장교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실상 100대대(442연대)는 젊은 일본 이민계를 잡아두는 구실이었을 뿐 전장으로 보낼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사실 미국으로서도 행여 이 아시아 부대가 전장에서 공훈을 세우기라도 하면 타오르는 일본에 대한 적계심도 누그러질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최초의 파병은 이미 전투가 끝난 북아프리카였다. 부대원과 부대 지휘관의 강력한 항의로 이후 5군단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곧 볼투르노 강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특히 독일 공수부대가 방어하여 악마의 산이라 불린 안지오에서는 독일 전차부대 위치를 알아 내기위해 아카호시 일병 (Irving Akahoshi)과 함께 대낮에 적병 2명을 사로 잡아 중요정보를 캐내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연합군은 꽉 막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결적적인 정보였다.

*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행군중인 442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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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전선에서 소대장이 적전을 관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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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기상천외한 전술로 독일의 방어선이었던 구스타프 라인과 고딕 라인의 붕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피사를 공략할때 피사의 탑위에 맨처음 올라간 연합군역시 바로 그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전선 참전 후에는 남프랑스에 작전장교로 투입되었다. 브뤼에르와 비퐁텐느란 두 마을의 해방에 앞장섰으며, 이 중 남프랑스의 비퐁텐느의 교회 벽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마을 노인들도 그를 전쟁영웅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까피텐 김”(김 대위)으로 불린다. 비퐁텐느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1944년 말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휴식을 가졌다. 이후 유럽으로 돌아가려 하는 찰나,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이후 그의 전술은 연구대상이 되어 미육군 군사교본을 다시쓰게 만들었다.

이후 이 젊은 영웅에게는 꿈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던중 1950년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 당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던 김영옥은 재입대했고 대위로 군에 복귀하였다.
참전후 한국인 유격대인 배내대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배내대 유격대는 흥남 철수 때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 중에서 선발한 유격대였다. 이 임무를 마친 후 김영옥 대위는 7 보병사단 31연대의 정보참모가 되었다.

1951년 4월, 31연대가 소양강을 건너 17연대와 임무 교대하자마자, 중국군의 춘계 공세가 개시되었다. 31연대는 다시 소양강을 건너 철수했는데, 김영옥 대위에게 미군 및 한국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인제군 계운동 계곡의 다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차 1개 소대를 이끌고 완전히 후퇴할 때까지 최소한 몇 시간을 버티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차 소대를 다리 남쪽에 세워 놓고 김영옥 대위는 후퇴하던 중대급 한국군 보병들을 멈춰세운 후, 그들과 함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여 후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51년 10월, 김영옥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1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 백인 병사들을 지휘하는 보병대대장이 된 사람은 미군 역사상 김영옥 소령이 최초였다. 그만큼 김영옥 소령이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31연대장 맥카프리 대령의 지시로 5월 23일부터 실전 경험이 없던 대대장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이 조치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미국에서 유색인종 최초 대대장이라는 수식어는 현재도 남아 있다.

1951년 5월 무렵, 31연대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와 함께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연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큰 패배를 당한 휴우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김영옥 대위가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병사들의 사기 고양이었다. 구만산·탑골 전투에서는 전진하기를 주저하던 병사들을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고, 금병산 전투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데 팔짱을 끼고 태연히 돌아다니며 엄폐물에 숨어 총만 높이 들어 마구잡이 사격을 하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자기 목숨을 내놓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부대 사기는 다시 올라갔고, 그가 담당한 구역은 처음과 달리 5월 31일 이후 다른 대대들과 달리 60km나 북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형태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철의 삼각지대에서 아군의 오인 포격으로 중상을 입은 김영옥 대위는 일본의 오사카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8월 27일에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 후 10월에 소령으로 진급하고 은성무공훈장 및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정식으로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연대장이 병사들을 무리하게 전투에 내모는 것에 반대했고, 그 때문에 1952년 9월에 반강제로 귀국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포트 베닝의 미국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1956년부터 1959년까지는 독일에서 7사단 86연대 2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59년 중령으로 진급한 후 캔자스 주의 포트 리브에서 교관으로 근무한 후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다시 대한민국에 부임했다. 부임 후, 전시 방어 체제, 예비 병력 동원 체제, 청와대 방어 등의 기초를 고안했고, 영공 방어를 위한 대공미사일부대 창설을 군사고문단 내에 건의하여 호크 미사일부대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65년 대령으로 진급한 김영옥은 유럽과 하와이를 돌며 근무하다가 1972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여러 사회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입은 부상이 50여년 동안 그를 괴롭혔고, 말년에는 방광암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2005년 7월, 방광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던 김영옥은 그해 말에 결국 사망했다. 사망 후 하와이 주 호놀룰루 근처 펀치볼 국립묘지의 100대대 묘지 근처 영면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명의 군인으로 최고였던 김영옥은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명예는 사회 봉사활동으로 빛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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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보병대대장으로 근무하던 김영옥은 부대 군목이었던 샘 닐이 고아 몇 명을 데려오자, 직접 고아원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고아들을 보호하도록 했다. 또 재정 면에서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을 지원했다. 휴가를 나가는 병사들에게 위문품을 들고 고아원을 방문하여 고아들과 어울리도록 했다. 이는 고아원을 도울 뿐아니라, 병사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김영옥의 대대 장병들은 자기 봉급에서 1~2달러씩 갹출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지역 사회에서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이 김영옥의 노력으로 탄생한 단체이며, 인종 차별 철폐 운동과 미국에서 가정 폭력을 당한 아시아계 여성들을 위한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을 건설했다. 이런 노력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훈장 모란장과 한국방송공사의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노령과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김영옥은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조사를 위한 조사 위원회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442연대를 기념하기 위한 고 포 브로크 재단(Go For Broke)설립하는등 수많은 사회봉사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사회활동은 전쟁영웅을 더욱 돗보이게 하였으며 우리는 오늘 그의 그림자인 혼다의원을 통해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라는 과실을 보게 된것이다.

그를 아는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 중령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
- 마크 클라크 前 미 5군 사령관
"미 보병학교 시절 한국계인 김영옥 대령 덕에 어깨가 으쓱했다."
- 채명신 前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닮았으면 하는 인물"
- 김영옥의 전기를 쓴 한우성

그의 업적만큼 훈장도 엄청나다.
이탈리아 -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 십자무공훈장(1950년), 레종도뇌르 훈장 (2005년 2월)
미국 - 무공훈장 등 10여 차례 받음
대한민국 - 국민훈장 모란장(2003년) 태극무공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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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드오브브라더스에서 흰 콧수염 날리던 "로버트 싱크"대령을 기억하시는지? 윈터대위를 인정하고 물심양면 잘 끌어 주셨던 그분! 그분이 한국전 당시 김영옥대령이 속한 7사단 부사령관이었다. 김영옥 대령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수많은 작전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 극중 로버트 싱크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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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 로버트 싱크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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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2연대의 치열함은 전투 참전사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안지오 공략전은 최고의 정예들이 맞뭍은 전투였다.
- 2차대전
Naples-Foggia
Anzio
Rome-Arno
North Apennines
Rhineland
Po Valley
-걸프전
iraq

* 김영옥대령의 장례식 사진들을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 Wiki에서 442연대에 대한 자료를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 Wiki에서 100대대에 대한 자료를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2007/06/27 10:48 2007/06/27 1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