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그림 보며 웃는분은 밀메냐, 웃기지 않으신분은 보통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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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유용원 군사세계 게시판 ^^
2007/09/07 21:11 2007/09/07 21:11

아~ 정말 통탄할 노릇이다.
이런 배운것이 없고 공부는 할 생각하지도 않는 인간들이 이나라의 종교지도자라고 하니 너무 한심하고.. 이런 인간들 밑에서 설교 듣는 분들이 너무나 불쌍하다.

어느 블로그에서 퍼온 "신비한 이스라엘의 승리"에서...
1984년 5월 14일 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나라를 잃은 지 2534년 만에 독립했습니다.
작은 이스라엘 나라에 독립을 했는데, 강한 아랍나라들이 연합군이 되어서 세 번이나 공격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세 번이나 이 전쟁을 승리했습니다.
이스라엘은 1차 전쟁을 25일만에 승리하였습니다.
2차 전쟁을 11일만에 승리하였습니다.
3차 전쟁을 6일만에 초전 박살 시켜서 세계를 경악케 했습니다.

그 해법을 자세히 알기 위해서 우리 정부에서 군사 전문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10일 걸려서 조사했지만 이렇다할 정확한 조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지리적으로 보아도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좁은 땅 덩어리입니다.
엄청난 아랍 연합군에 비하면 인적 자원은 60대 1이 됩니다.
연합군이 1억 6천만에 비해서 이스라엘은 267만, 약 대구 인구정도 밖에 되지를 않습니다.
군사적으로도 100대 1의 비율이었습니다. 이렇게 작은 나라, 이 무력을 충분히 갖추지 못한 나라가 승리를 했는지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돌아가려고 할 때에 그 조사원 중에 크리스천 대령이 <우리가 한번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을 만나보자!> 이렇게 제안을 해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를 만났습니다.
종교지도자가 하는 말이! 놀랐습니다
①이스라엘이 1차 전쟁을 할 때는 사막에서 모래 바람이 일어나서 적진의 눈에 적진의 시야를 가려서 대 승리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②2차전 승리는 사막에서 벌떼가 나타나서 그들을 쏨으로 이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③3차전은 하늘에서 불비가 내려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은 3차전 승리를 전폭기 조정사가 촬영을 했는데 그 사진에도 불비가 내리는 것이 찍혔다고 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전쟁 때마다 ■모래 바람이 일어나고, ■벌떼가 일어나서 쏘고, ■하늘에서 불비가 내렸다는 것은 하나님이 전능하심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전쟁사에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 주셔서 우리가 승리했습니다> 이런 보고였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와 아랍 나라가 싸울 때에 아랍군은 수십만이 되고, 이스라엘은 소년 252명, 장정7천명밖에 안 됩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크게 전쟁에서 승리를 했습니다. 그 원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위하여 싸워 주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해 주셔서 이스라엘이 승리를 했습니다.
본 블로그를 만들면서 장장 2년여동안 이스라엘 전쟁사를 요약해서 올렸다.
글쓰는 나는 장장 2년이란 세월동안 졸필이지만 이스라엘의 전쟁 요인과 승리의 요인을 분석한 결과 내린 결론은 "철저한 준비"에 그 원인이 있음을 발견하였다.

물론 이스라엘은 지지리도 복이 많아 미국이라는 큰 아군을 등에 업고 있기도 했지만 4차 중동전을 제외하고 1,2,3차전을 보면
1차전은 완강한 저항에 놀란 중동군이 철수한것이고
2차전은 프랑스, 영국 등에 떠밀리기는 했지만 철저한 계산과 준비속에 진행된 전쟁이었다.
3차전은 더욱더 철저한 준비와 계산이 있었으며
꺼꾸로 4차전은 철저한 준비를 한 이집트와 시리아의 개전초기 눈부신 승리가 있었다.
물론 중후반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들은 진것이다.
이것은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한 인간의 노력을 모두 무시하고 1차전에는 모래바람이 2차전에는 벌떼가 3차전에는 불비가????
당췌 이런 논리 개무시 역사 개무시 인간 개무시가 어디 있단 말인가?

인본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신이라는 도구도 인간위에 두는 이유도 모두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함인데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있지도 않는 말을 만들어내는 이런 개사이비 종교 지도자가 어디 있단 말인가?
정녕 이나라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정신적 지도자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란 말인가?
참으로 통탄스럽다.
2007/09/03 21:19 2007/09/03 21:19
1950년 6월 25일.
북한은 전방 5개사단과 후방 5개 사단을 합쳐 10개 사단으로 남침하였다.
최전방에 2차대전때 한끗발 날리던 T-34/85 전차와 Su-100 자주포등을 동원한 전형적인 구소련식 기동전술을 구사했고 중국에서 항일전쟁하던 조선의용군 출신의 명장들로 인하여 단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한다.

우리의 텔레토비 조상들의 활약은 여기서부터 시작이다.

원래 김일성이 원하는 것은 2차대전 개전 이전에 독일이 오스트리아 합병때와 같이 수도인 "빈"으로 부우우웅~ 하고 들어가 합병 찬반투표하고 담날 압도적인 찬성표인 99.7%로 합병했던 그 사건을 그대로 벤치마킹하여 수도 "서울"로 부우우웅~ 들어가 국회의원들 모아 놓고 김일성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자는 계획이었던것 같다.
(당시는 대통령 간접선출방식이었다. 대통령 직선제 된지 얼마안된다. 기억하자)
(이것도 엄청 계산된 결과인듯하다 2대 국회 임기가 1950년 5월 31일. 전국에서 짐 정리해 국회 근처로 이사와서 정상적인 근무가 가능한 때를 한 3주후로 잡았던것 같다.)

* 1938년 3월 12일 오스트리아는 즐겁게(?) 독일에 합병되었다. 이것을 벤치마킹한 우리의 김일성 아저씨는 즐거운 상상을 하였을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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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암튼 3일동안 장갑차 몇대 있는 한국군을 빗자루 쓸듯이 흩어버리고 서울입성에는 성공했으나...

* 서울에 입성한 북한군의 T-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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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상상속에서 필수적이었던 우리의 2대 텔레토비님들이 모두 몸을 숨겨 버린것이다!!! 그덕에 정족수 부족으로 국회를 개회할 수 없는 사태로 발전하였고 벼룩처럼 다 튀어버린 국회의원들을 찾아 서울에서 다시 3일을 보낸다.
결국 김일성이 꿈꾸던 평화적(?) 공산화는 실패하였고 3일간의 남하중지가 무엇때문이었는지 미스터리한 일로 전사에 기록되었었다.
(혹자는 한강방어선의 성공적 방어라 하지만 독일도 못막아낸 T-34러쉬를 무슨 수로 막아낸단 말인가?)
그때문에 맥아더 사령관의 한강방어선 시찰이 이루어지고 이 시찰로 인하여 미군의 참여가 결정되는 전쟁의 방향을 틀어버린 계기가 되었다.(인천상륙작전도 이때 구상했다고 전해진다)
아무튼 당시에 텔레토비님들께서 용감히 출근하였다면 어떻게 역사는 바뀌었을까?

* 첨언 - 원래 북한군의 군사 계획은 이러하다. 서울까지 두두두~ 달려서 점령하면 춘천/홍천의 우회침투로를 돌아돌아 수원을 거쳐 한강이남에 방어진을 친 국군을 포위섬멸하여 하였다. 그간 3일의 지체사유는 전사의 최대 미스터리사건이며 6사단의 춘천/홍천 방어전의 승리가 바로 이러한 3일간의 시간을 벌었다는것이 정설처럼 통했다.
그러나, 이는 기동전의 기본원리를 깡그리 무시한 설이다.
롬멜의 7사단이 그러했듯 패튼의 3군단이 그러했듯 한번 가속도가 붙은 기갑사단은 세우는 것이아니다. 세우는 것 자체가 기동에 의한 충격력을 0로 만드는 것으로 이는 자살행위이다.
다시말해 한번 시동건 기갑부대는 뒤에서 원자탄이 터지든 좌우측의 날개가 날아가든 무조건 달려서 종심 깊숙히 박혀 들어가는 창이 되어야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다.
이러한 속성때문에 기갑부대는 최고지휘관이 최선두에서 지휘한다. 왜? 상황이 매번 변하기때문에 상황판단을 하여 무조건 달려나가기위함이다. 춘천을 돌아 수원에서 똥침날리기로 된 부대가 제시간에 도착못했다면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 기갑부대는 차선을 즉시 선택하여 한강을 도하해 도보로 철수하는 국군을 섬멸했어야 정상이라는 이야기다.
모양새가 마치 덩케르크 철수 작전 직전의 히틀러를 연상시킨다.
영국이 알아서 항복할 것이라는 지례짐작으로 구데리안의 진격을 승인하지 않았고 이덕에 34만 대군이 영국으로 멀쩡히 돌아갔고 이 군대는 몇 년 후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32만이 다시 돌아온 덕에 게임 오바되버렸다.
이와 같이 생각해보면 김일성은 히틀러의 오스트리아 합병과 같이 단기간에 끝장보려 했을것이라는 판단이 더 설득력 있어 보인다.
2007/08/28 09:28 2007/08/28 09:28

1. 이스라엘 "사베나 572편"
1972년 5월 6일 검은 9월단 소속의 테러리스트가 이스라엘로 가던 여객기 사베나 572편을 납치하자 다음날 새벽 4시 정비원으로 위장한 특공대 16명을 투입 10분만에 인질범 2명 사살, 2명 생포하였고 승객 2명이 총격전 도중 사망하고 1명은 부상하였다. 대원중 1명이 부상하였지만 곧 회복함

2. 뭰헨의 참극
1972년 9월 5일 8명의 검은 9월단소속 인질범이 이스라엘 선수단촌에 난입 저항하던 2명이 죽고 총 9명이 인질로 잡힌다.
오전 9시 사태의 전말을 알게된 서독정부는 즉각 경찰 대표로 협상을 내보냈고 뒤로는 국경수비대 특수부대원(GSG-9부대)을 선수로 위장시켜 접근시키지만 TV에서 생중계하는 바람에 범인들이 의도를 알아차리고 철수하게 된다.
저녁무렵 인질범들은 카이로로 이동하겠다고 했고 이에 서독정부는 동의하여 NATO기지에 항공편을 준비한다. 물론 저격수와 승무원으로 위장한 특수부대를 배치하고 있었다.
그날 밤 10시 반쯤 그들을 수송하는 UH-1헬기가 NATO공군기지에 도착했고 범인이 4명째 내리자 저격을 시작했다. 인질범의 숫자가 4명으로 잘못안 것이다. 이덕에 범인들의 저항이 시작되어 인질 9명이 모두 죽고 그들을 수송하던 헬기는 수류탄에 잿더미가 되었으며 조종사 역시 그자리에서 죽었으며 경찰 1명도 전사한다. 새벽 1시경 총격전이 끝난뒤 3명의 인질범을 붙잡았다. 이에 격분한 이스라엘은 모사드를 동원하여 테러로 응징한다. 이것이 유명한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에도 묘사된 "뮌헨"의 전말이기도 하다.
* 경찰과 협상중인 검은9월단 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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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류탄에 파괴된 서독의 수송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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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들이 남기고 간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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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스라엘 전설의 "엔테베"
1976년 7월 4일 C-130 수송기 4대와 지휘기인 보잉 707 2대가 이스라엘 본국으로부터 4,000km나 떨어진 우간다의 엔테베 공항상공에 도착했고 그중 C-130 4대가 착륙하여 100여명의 이스라엘군을 쏟아 내었다.
인질범 7명을 사살하고 우간다군 20명, 10여기의 우간다 공군기, 레이더 시설을 파괴하고 불과 57분만에 모든 인질을 구출해 다시 떠오른 작전이다.
이스라엘 현장 지휘관은 현장에서 전사했고 인질 3명이 총격전 도중 사망, 실종자 1명은 당시 병원에 입원중이었는데 우간다 독재자인 이디아민 대통령이 이 작전으로 분개하여 살해하였다.
* 이디아민의 전용차로 위장하여 우간다군을 속아 넘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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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되어 돌아온 인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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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한 전사자 요나단  네탄야후 중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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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네델란드 열차 사건
1977년 5월 23일 9명의 인도네시아 말루쿠 독립운동가들이 열차에 난입하여 승객 50명을 인질로 붙잡는다. 협상5일째 말루쿠 독립을 지지하는 10여명이 자청해서 인질로 더 잡히는 사건도 있었다. 사건 21일째인 6월 11일 F-104 전투기 6대가 기차위로 초저공 비행을 실시하여 폭음으로 인질범을 당황하게 만든뒤 네델란드 해병대 소속의 특수부대 BBE를 투입하여 객차에 난 구멍에 1만5천발의 집중사격을 통해 인질범 9명중 6명을 사살하고 3명을 생포한다.
인질중 1명은 이와중에 사망했으나 작전은 성공하여 생포한 3명의 인질범을 법정에 세우는데 성공한다.

5. 네델란드 학교 인질사건
위의 열차사건과 같은 시각 4명의 인질범이 초등학교로 난입하였으나 열차사건과 같은 날 장갑차로 무장한 네델란드 BBE가 초등학교 벽을 폭탄으로 뚫고 난입하자 항복해버렸다.

* 위 2사건 해결의 중심 B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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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너스~ BBE로 찾는 도중에 나온 그림. 모델은 아마도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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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서독의 란주트 인질사건
1977년 10월 13일 팔레스타인 PFLP 소속 4명이 루프트한자 181편을 납치하여 5일동안 로마, 키프로스, 바레인, 두바이, 아덴 등 재보급을 전전하며 지중해를 비행하다 소말리아 모가디슈공항까지 찾아왔고 외부와 연결을 시도하던 조종사 슈만을 살해해버린다. 이에 서독정부는 1명을 석방하여 소말리아로 보냈다고 응답하고 GSG-9부대를 투입한다. 소말리아 군이 외곽경계를 맡고 장비와 작전지도는 영국 SAS가 담당했다. 동체와 날개옆을 폭약으로 구멍을 뚫고 당시 최신 장비인 섬광탄을 투척하며 기내에 난입 인질범 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 이와중에 약간명의 부상자가 발생하는 선에서 마무리 된다.
* 모가디슈에 착륙했던 란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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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된 인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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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경수비대 소속의 특수부대 GSG-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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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란 미대사관 인질사건
1979년 호메이니를 필두로한 이슬람 혁명으로 팔레비왕조가 추방되었다. 팔레비2세는 미국에 망명생활하던도중 죽었고 사체는 미국 병원 영안실에 안치된다. 이에 호메이니는 이란 범죄자를 이란으로 보내라고하고 미국이 거절하자 11월 4일 이란의 대학생들이 미대사관에 난입 63명을 인질로 잡고 2주후 13명 1980년 7월에 한명을 석방 남자 50명 여자 2명을 잡아두게 되었다. 이에 미국은 1980년 4월 7일 단교후 공기밥 작전이라고 불리어진 작전을 계획하는데 주축은 당시 미 최정예로 키워진 델타부대였다. 그런데 문제 발생. 다들 숟가락 하나씩 올려놓으려는 군부로 인하여 육군, 해군, 해병대에 공군까지 가세하여 지휘계통이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고 공기밥 작전으로 일단 사막까지 이동하여 CH-53의 보급을 수행하고 C-130 수송기로 날라오는 연료를 보급한후에 2단계로 독수리발톱을 발동하여 테헤란에 있는 인질을 구출하기로한다.
C-130이 임시 기지로 도착하는것까지는 좋았으나 CH-53중 일부가 모래바람으로 길을 잃어버린데다가 모래로 인해 CH-53고장! 거기다가 이란 버스가 지나가며 임시기지를 목격하는바람에 이란인 44명을 도리어 감금하는 상황까지 간다.
결국 하는수 없이 철수하는 미군. 그러나 CH-53과 C-130이 공중충돌하여 8명이 죽고 고장난 CH-53을 멀쩡한체로 버리고 철수하였으며 기밀문서도 고스란히 두고 나온다.
아무튼 대실패한 미군덕에 인질들은 잡힌지 444일이 지나고서야 협상을 통해 풀려났다.
* 사로잡힌 미대사관 직원/경비병 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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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거리 이착륙을 위해 로켓을 장착한 C-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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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륙중인 CH-53 (사진은 최근 아프카니스탄에서 찍은 것임, 비슷한 분위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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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영국의 이란대사관 인질사건
1980년 4월 30일 이라크에서 훈련받은 이란 남부 독립단체인 DRMLA의 인질범 6명이 대낮에 이란대사관에 난입 26명을 인질로 잡는다. 이에 영국정부는 협상을 진전시키는데 5일동안 5명을 석방한다. 6일째 인질범들은 본보기로 인질한명을 죽여 창밖으로 던지자 철의 여인이었던 데쳐마가렛 수상이 진압을 명령했고 히드로 국제 공항으로 진입하는 모든 항공기를 저공비행시키며 작전 수행을 숨겼고 근처 도시가스 공사장의 소음을 최대한 키워 벽으로 마이크와 내시경을 넣어 인질범의 상태를 감시. 5월 5일 저녁 SAS가 투입되어 전기를 끊고 뒷문으로 난입하여 5명을 사살하였고 인질 1명이 총격전 도중 사망하는 선에서 모두 구출하는데 성공한다. 45분간 BBC방송으로 생중계된 이 작전은 대테러전 전문 부대인 SAS를 더욱 유명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 옥상에서 진입하는 훈련중인 SAS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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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BC로 생중계되어버린 구출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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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비극의 777부대 사건
1985년 11월 23일 밤 9시 이집트혁명단체소속 3명의 인질범이 이집트에어 648편을 공중납치. 이와중에 이집트 비밀요원이 사격을 가하여 인질범 1명을 사살하고 반격으로 본인도 죽게되었다. 총격전으로 기내압이 떨어져 저공비행했고 말타에 착륙하게된다. 말타정부는 완강히 거부하고 활주로등도 꺼버렸지만 이집트 항공의 조종사의 기막힌 실력으로 안전하게 착륙.
몰타 정부는 하는수 없이 협상에 임하고 인질 13명이 풀려났다.
그러나 인질범들이 돌연 태도를 바꿔 15분마다 인질범 한명씩 죽이겠다고 했고 그 즉시 이스라엘 국적의 여자를 총으로 쐈으며 그 공언대로 4명의 미국인이 더 총에 맞아야 했다. (이중 3명은 살아났음). 이에 영국과 미국, 프랑스가 특공대를 투입하겠다고 나섰고 미국의 소개로 이집트군 특공대 777부대가 투입된다.
11월 25일 항공기 천정에 구멍을 뚫기위해 설치해둔 폭약을 터트리면서 구출작전은 시작됐지만 너무 많은 폭약으로 그 밑에 있던 승객 20여명이 즉사하고 섬광탄이 아닌 일반 수류탄을 출입구와 화물칸에 던지는 바람에 항공기 산소통이 폭발 화재가 발생하여 진입을 못하게된다. 이덕에 인질범들이 인질에게 총알 세례를 퍼부었고 인질 88명중 56명이 이과정에서 죽게되었다. 진입후 인질범 1명은 사살하였지만 주동자는 총을 버리고 총맞은 인질로 가장하여 병원까지 입원하였고 이후에 병원에서 체포 몰타에서 재판후 25년형을 받고 8년만에 풀려났지만 미국이 괴씸죄를 적용 체포하여 종신형을 구형해버린다.
* 납치된 이집트 항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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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서 나간자보다 누워서 나간자가 더 많았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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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콜롬비아 정의궁전 사건
1985년 11월 6일 콜롬비아 반군 M-19소속 35명이 콜롬비아 대법원에 난입하여 3백여명의 인질을 붙잡는다. 콜롬비아군은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3시간만에 1층을 장악하여 2백여명을 구출하는데 성공하지만 인질범들은 저항을 계속하게되고 이에 EE-9 장갑차를 왕창 끌고와서는 오후2시부터는 포격까지 퍼부어 버리며 진압작전을 재개하였고 이튿날까지 계속된 공방으로 도합 1백여명이 사망한다. 혹자가 왜이렇게 많은 장갑차를 끌고 왔느냐?라는 물음에 현장지휘관은 "민주주의를 지키기위해서"라고 답변.
* 그러니까.. 이런걸 왕창 끌고와서 포격해버렸다는 이야기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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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프랑스 오베아 동굴 인질사건
1988년 4월 22일  남태평양의 섬인 프랑스령 뉴 칼레도니아 에서 독립운동을 명분으로 내건 인질범들이 27명의 프랑스 경찰과 1명의 판사를 인질로 잡아 오베아에 감금하고 협상도중 인질 4명을 죽여버린다. 이에 10일만인 5월 5일 공수부대에서 34명, 경찰 공수특전단(EPIGN)에서 14명, 해군 특전단에서 16명, 경찰 특수부대(GIGN)에서 11명이 출동하고 동굴입구 기관총좌로 저항하는 인질범에게 화염방사기까지 사용하여 제압하고 19명의 인질범을 사살해 구출에 성공한다. 이와중에 구출부대원 2명도 전사한다.

12. 싱가폴 에어라인 117편 사건
1991년 3월 26일 파키스탄 인민당(PPP)이 되고 싶다는 인질범 4명이 에어라인스 117편을 공중납치하고 협상 도중 승무원 2명을 떠밀어 버린다.
이덕에 기내 상황을 자세히 알게된 싱가폴 당국은 싱가폴 특공대 SOF를 투입준비한다.
3월 27일 밤 5분마다 인질 1명씩 살해하겠다고 인질범들이 공포하자. 불과 2분만에 SOF가 난입 30초만에 인질범 4명을 사살하고 인질 전원을 부상없이 구출한다.
* 싱가폴 특수부대 SO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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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 종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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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프랑스 8969편 인질사건
1994년 12월 24일 알제리에서 프랑스로 가기위해 준비중이던 프랑스에어라인 8969편에 4명의 공항 보안요원이 탑승하여 항공기를 장악하고 GIA라는 단체 소속임을 밝히며 관제탑에 이륙승인요청하자 관제탑이 거절하고 이에 승객중 알제리 경찰을 찾아 사살한후 밖으로 던져버린다.
알제리 특공대가 포위하였고 프랑스는 경찰특공대인 GIGN을 준비시키는 한편 노약자를 풀어주면 프랑스 입국을 허용하겠다는 조건을 걸어 인질 63명이 풀려났으나 알제리 특공대가 포위를 풀지않자 이번에는 베트남 외교관을 살해해버린다.
12월 25일 밤 8시경 인질이던 프랑스 직원이 30분안에 이륙이 안되면 자신이 죽는다며 무선이 들어왔고 30분쯤 곧 죽었다. 26일 새벽 2시경에 알제리는 포위를 풀었고 항공기에 엄청난 다이너마이트가 장착됐음을 알아차린다. 인질범들의 진짜 목표는 파리상공에서의 자폭이었던 것이다.
기장은 연료문제를 들어 마르세이유로 향했고 알제리의 반대로 알제리 영토밖 스페인에서 대기중이던 GIGN도 마르세이유로 이동 착륙 20분전에 겨우 도착하여 정비요원 등으로 위장후 진입준비를 마친다.
항공기가 착륙하고 협박과 협상이 오고가는 도중 오후 5시경 섬광탄과 함께 진압이 시작되고 조종사는 항공기창문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관제탑 저격수가 인질범을 사살하는데 도움이 된다. 30분간의 총격전을 통해 인질범 4명을 사살하였지만 11명의 특공대원이 부상을 입었고, 13명의 승객과 3명의 승무원도 부상을 입었다.
* 진입중인 G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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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TV중계화면으로 조종사가 탈출한 방풍창이 열려 있고 이 사이로 인질범 2명이 저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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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페루의 일본 대사관 사건
1996년 12월 17일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열렸는데 MRTA라는 반군 게릴라 14명이 대사관에 난입하여 7백여명의 인질을 붙잡게 된다. 물론 당시 일본계이던 후지모리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이원영 대사도 인질에 포함되었으나 긴 협상 끝에 1차 인질석방에 포함되었다.
이에 페루정부는 땅굴을 통해 대사관으로 진입할것을 계획하고 주변 소음을 최대한 활용하여 땅굴을 팠고 4개월만인 4월 22일 오후 3시경 땅굴 3개소 입구에 폭약을 터트려 축구하던 인질범 3명을 폭사 시키며 140명의 특공대를 투입한다. 땅굴과 옥상으로부터 진입한 특공대는 인질이 있는 2층으로 제빨리 돌입하여 14명의 인질범을 사살하였고 그 총격전 와중에 2명의 특공대원이 희생되었으며 인질 1명이 사망한다.
* 일본 대사관을 장악하고 언론에 비친 인질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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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압작전은 시작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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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전후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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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모스크바 극장 인질사건
2002년 10월 23일 모스크바의 극장에서 "노르트-오스트" 공연의 2막이 진행되던 도중, 갑자기 체첸독립단체 42명이 난입하여 850여명의 인질을 붙잡는다. 당일 인질범은 환자와 어린이등 15명을 풀어주었으나 26세의 술취한 여자가 경찰의 제지를 뚫고 극장으로 난입하자 인질범들은 비밀요원으로 오인하여 사살해버린다.
이튿날 39명의 인질을 더 풀어 주었고 3일째는 19명을 더 풀어준다. 3일째 밤에는 열혈 여자 인질 한명이 빈병으로 여자 인질범을 공격하지만 실패하고 달아났고 그날밤 접근하던 경찰만 들통나게 되었다.
10월 26일 FSB(KGB가 전신)의 특수부대가 투입되었고 수면가스를 30분간 흘려보낸후 새벽 5시 30분 돌입하여 30분만에 작전을 마친다.
오전 7시경 가스로 쓰러진 사람들을 병원으로 후송하였는데 이 수면가스라고 알려진 가스때문에 67명이 죽었다고 발표되었으나 인질범 30명과 100여명의 인질이 이 가스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 진압부대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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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압이 시작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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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출작전후 후송되는 인질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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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면가스로 잠(?)이든 인질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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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전후의 끌려나오는 희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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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스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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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러시아 베슬란 학교 사건
2004년 9월 1일 개학식에 이슬람 과격단체와 체첸반군 혼성의 다인종 남여혼성 인질범 30여명이 난입하여 1천 2백명의 인질을 잡는 사건으로 첫날 좁은 체육관으로 1,200여명의 인질을 가두어 더위에 실시하는 인질이 속출하였다.
이튿날 부터 시작된 협상과정에서 일부 풀려나기는 하였으나 가족의 생이별로 울음바다가 되고 여기에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받은 인질범들이 주변을 포위하고 있는 러시아 경찰에 RPG 2발을 발사하기도 하였다.
3일째 폭발음과 함께 인질들이 달아나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진압군이 투입되었다. 그와 동시에 인질범들의 무차별 학살이 시작되었으며 중무장한 인질범을 제압하기위해 T-72전차와 Mi-24하인드까지 무차별 포격을 실시.
이와중에 러시아 군경에서는 도망병이 속출하게 되었고 동네주민들이 총을들고 나타나 인질범을 죽이겠다고 끼어들면서 혼란에 혼란을 거듭하고 인질범이 옆건물로 도망가는것이 목격되자 그 건물 통체로 날려버리기도 한다.
이렇게 8시간동안의 격전끝에 어린이를 중심으로 3백여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며 끝을 맺었다.
* 구출작전은 의도하지 않게 흘러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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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겨진것은 희생자와 눈물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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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이라크 기독교 평화 사역팀 인질사건
2003년 이전부터 이라크에 들어가서 선교활동과 봉사활동을 하던 기독교 평화 사역팀(CPT)은 이라크 전쟁을 반대하였고 전쟁중인 2005년 11월 26일 4명이 이슬람 성직자들을 만나러 가던중 납치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불행이 미국탓이라고 했고 어떠한 행동도 하지말아달라고 하는 등 인질범에 동조하였다.
해를 넘겨 2006년 3월 10일 인질중 한명이 살해되어 이라크 쓰레기장에서 발견되었다. 물론 고문흔적과 함께. 그러나 CPT에서는 거짓이라며 그 사람들이 그럴리가 없다고 하며 구출작전자체를 반대한다. 3월 23일 미국, 영국, 캐나다, 신생이라크군으로 특공대를 조직 인질구조에 나섰지만 인질범들은 없었다.
인질들은 더 웃긴게 구축작전에 협조하지 않았고 인질범에 대한 증언도 하지 않아 목숨걸고 작전에 참가한 특공대원들만 이상하게 만들어 버린다.

2007/08/01 17:50 2007/08/01 17:50

한인 민초운동이 이룬 ‘위안부 美의회 결의안’ (헤롤드 생생뉴스)
美하원 위안부결의안 압도적 다수 통과 (연합뉴스)
숨가쁜 ''막후 외교전''… 日 눌렀다 (세계일보)
미하원 외교위, 성노예 결의안 압도적 통과 (조선일보)
위안부 결의안 채택…일본 정부 '내심 곤혹' (SBS)

등등등 각종언론에서 6월 27일 내보낸 기사의 타이틀들이다.
본 법안이 생기면서 어떻게 자라왔는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 조사를 해봤다.

1999년 켈리포니아 주의회의 일본계 3세 혼다의원이 "일본군위안부’문제에 관하여 일본정부에게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결의안" 혼다결의안을 발의하였다.
이때만해도 그리 알려진 이슈가 될정도는 아니었지만 일본계인사들의 공분을 샀고 엄청나게 거센 압박이 왔다고 한다.
그때 혼다의원은 2차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영웅 고 김영옥 예비역 대령을 찾아간다.
2차대전 일본계 참전용사회를 이끌던 김영옥 대령은 혼다의원의 이야기를 듣고 참전용사회의 회원들에게 지지서명을 받아 혼다의원에게 전달했다.
혼다의원에게 천군만마와 같은 2차대전 "일본계 참전용사회"의 지지 서명으로 일본계 내부의 의견은 뚜렸해진것이다.
그리고 8년후인 2007년 6월 26일 일본의 거센반발과 WP지에 자기변명과 미국의 도덕성에 대한 공격을 하는 패착으로 혼다 의원의 결의안은 하원을 통과했다.

그럼 과연 2차대전 참전용사회는 무엇이며 김영옥 대령은 누구이길레 일본계 이민자사회의 목소리를 한방에 잠재울 수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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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생이신 고 김영옥 대령은 LA에서 독립운동을 하시던 김순덕님과 노라 고님사이에 태어나셨고 1939년 육군 모병소로 찾아갔으나 아시아계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1941년 아시아계도 받아 주게 법령이 정비됨에 따라 그는 사병으로 지원할 수 있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계 이민자들을 사막의 수용소로 집어 넣었고 일본계 이민자들은 국가에 충성할 기회를 달라고 탄원하는 등 속칭 "니세이 부대" 100대대가 창설되게 되었다.
*훈련받을때의 100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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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이 100대대는 442연대 1대대로 다시 구성된다.
당시 젊은 김영옥은 사병으로 입대했지만 능력을 인정받았는지 장교후보생으로 교육받았고 임관후 이곳 442연대 1대대로 전입오게 된다.
대대장은 김영옥에게 한국계와 일본계가 사이가 좋지 못하고 일본의 식민지인 한국인이 자신들을 지휘하는것에 대해 사병들이 문제를 일으킬것을 우려하여 다른 부대로 전출을 제의하였지만 "우리는 미국인이며 같은이유로 싸우려 할뿐입니다"라며 Bravo중대 2소대장으로 장교생활을 시작하였다.

사실상 100대대(442연대)는 젊은 일본 이민계를 잡아두는 구실이었을 뿐 전장으로 보낼 생각은 추호에도 없었다. 사실 미국으로서도 행여 이 아시아 부대가 전장에서 공훈을 세우기라도 하면 타오르는 일본에 대한 적계심도 누그러질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최초의 파병은 이미 전투가 끝난 북아프리카였다. 부대원과 부대 지휘관의 강력한 항의로 이후 5군단에 배속되어 이탈리아 전선에 투입되었고 곧 볼투르노 강 전투에서 무공을 세웠으며, 특히 독일 공수부대가 방어하여 악마의 산이라 불린 안지오에서는 독일 전차부대 위치를 알아 내기위해 아카호시 일병 (Irving Akahoshi)과 함께 대낮에 적병 2명을 사로 잡아 중요정보를 캐내는데 성공하였다. 이것은 연합군은 꽉 막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결적적인 정보였다.

*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행군중인 442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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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 전선에서 소대장이 적전을 관찰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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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도 기상천외한 전술로 독일의 방어선이었던 구스타프 라인과 고딕 라인의 붕괴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피사를 공략할때 피사의 탑위에 맨처음 올라간 연합군역시 바로 그였다고 한다.
이탈리아 전선 참전 후에는 남프랑스에 작전장교로 투입되었다. 브뤼에르와 비퐁텐느란 두 마을의 해방에 앞장섰으며, 이 중 남프랑스의 비퐁텐느의 교회 벽에는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마을 노인들도 그를 전쟁영웅으로 부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까피텐 김”(김 대위)으로 불린다. 비퐁텐느의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고, 1944년 말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와 휴식을 가졌다. 이후 유럽으로 돌아가려 하는 찰나, 유럽에서의 전쟁이 끝났다.
이후 그의 전술은 연구대상이 되어 미육군 군사교본을 다시쓰게 만들었다.

이후 이 젊은 영웅에게는 꿈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간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러던중 1950년 아버지의 나라 한국에서 전쟁이 터졌다. 당시 세탁소를 운영하고 있던 김영옥은 재입대했고 대위로 군에 복귀하였다.
참전후 한국인 유격대인 배내대 유격대를 지휘하며 정보 수집 임무를 수행했다. 배내대 유격대는 흥남 철수 때 남쪽으로 내려온 피난민 중에서 선발한 유격대였다. 이 임무를 마친 후 김영옥 대위는 7 보병사단 31연대의 정보참모가 되었다.

1951년 4월, 31연대가 소양강을 건너 17연대와 임무 교대하자마자, 중국군의 춘계 공세가 개시되었다. 31연대는 다시 소양강을 건너 철수했는데, 김영옥 대위에게 미군 및 한국군의 철수를 엄호하기 위해 인제군 계운동 계곡의 다리를 지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전차 1개 소대를 이끌고 완전히 후퇴할 때까지 최소한 몇 시간을 버티라는 명령을 받았다. 전차 소대를 다리 남쪽에 세워 놓고 김영옥 대위는 후퇴하던 중대급 한국군 보병들을 멈춰세운 후, 그들과 함께 임시 방어선을 구축하여 후퇴를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지원했다.

1951년 10월, 김영옥 대위는 소령으로 진급하고 1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당시 미국에서 유색인종으로 백인 병사들을 지휘하는 보병대대장이 된 사람은 미군 역사상 김영옥 소령이 최초였다. 그만큼 김영옥 소령이 능력을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31연대장 맥카프리 대령의 지시로 5월 23일부터 실전 경험이 없던 대대장을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부대를 지휘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이 조치는 형식적인 것에 불과했지만, 미국에서 유색인종 최초 대대장이라는 수식어는 현재도 남아 있다.

1951년 5월 무렵, 31연대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1950년 12월, 장진호 전투에서 해병대와 함께 흥남으로 철수하면서 연대장까지 전사하는 등 큰 패배를 당한 휴우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김영옥 대위가 대대를 실질적으로 지휘하게 되면서 제일 먼저 착수한 것은 병사들의 사기 고양이었다. 구만산·탑골 전투에서는 전진하기를 주저하던 병사들을 권총으로 위협하기도 했고, 금병산 전투에서는 총탄이 빗발치는데 팔짱을 끼고 태연히 돌아다니며 엄폐물에 숨어 총만 높이 들어 마구잡이 사격을 하는 병사들을 독려하는 등, 자기 목숨을 내놓고 노력했다. 이런 노력에 힘입어 부대 사기는 다시 올라갔고, 그가 담당한 구역은 처음과 달리 5월 31일 이후 다른 대대들과 달리 60km나 북쪽으로 불쑥 솟아오른 형태가 되었다.
같은 해 6월, 철의 삼각지대에서 아군의 오인 포격으로 중상을 입은 김영옥 대위는 일본의 오사카로 후송되어 치료를 받고, 8월 27일에 다시 전선에 복귀했다. 그 후 10월에 소령으로 진급하고 은성무공훈장 및 동성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정식으로 1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새로 부임한 연대장이 병사들을 무리하게 전투에 내모는 것에 반대했고, 그 때문에 1952년 9월에 반강제로 귀국했다.

1952년부터 1956년까지 포트 베닝의 미국 보병학교의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1956년부터 1959년까지는 독일에서 7사단 86연대 2대대장으로 근무했다. 1959년 중령으로 진급한 후 캔자스 주의 포트 리브에서 교관으로 근무한 후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주한 미국 군사고문단(KMAG)의 일원으로 다시 대한민국에 부임했다. 부임 후, 전시 방어 체제, 예비 병력 동원 체제, 청와대 방어 등의 기초를 고안했고, 영공 방어를 위한 대공미사일부대 창설을 군사고문단 내에 건의하여 호크 미사일부대 창설의 산파 역할을 했다.

1965년 대령으로 진급한 김영옥은 유럽과 하와이를 돌며 근무하다가 1972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전역 후에는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여러 사회 봉사활동을 하며 지냈다. 하지만, 한국전쟁 때 입은 부상이 50여년 동안 그를 괴롭혔고, 말년에는 방광암으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아야 했다.

2005년 7월, 방광암 수술을 위해 입원했던 김영옥은 그해 말에 결국 사망했다. 사망 후 하와이 주 호놀룰루 근처 펀치볼 국립묘지의 100대대 묘지 근처 영면하게 되었다.

이처럼 한명의 군인으로 최고였던 김영옥은 군인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그의 명예는 사회 봉사활동으로 빛이 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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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당시 보병대대장으로 근무하던 김영옥은 부대 군목이었던 샘 닐이 고아 몇 명을 데려오자, 직접 고아원을 설립하여 그곳에서 고아들을 보호하도록 했다. 또 재정 면에서도 지속적으로 지원하여 그들을 지원했다. 휴가를 나가는 병사들에게 위문품을 들고 고아원을 방문하여 고아들과 어울리도록 했다. 이는 고아원을 도울 뿐아니라, 병사들에게도 도움이 되었다. 김영옥의 대대 장병들은 자기 봉급에서 1~2달러씩 갹출하기도 했다.

이런 경험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지역 사회에서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게 하는 바탕이 되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인건강정보센터, 한미연합회, 한미박물관 등이 김영옥의 노력으로 탄생한 단체이며, 인종 차별 철폐 운동과 미국에서 가정 폭력을 당한 아시아계 여성들을 위한 “아시안 여성 포스터 홈”을 건설했다. 이런 노력으로 대한민국 정부의 국민훈장 모란장과 한국방송공사의 KBS 해외동포상을 수상했다.

노령과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김영옥은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 조사를 위한 조사 위원회에도 직접 참여했으며, 442연대를 기념하기 위한 고 포 브로크 재단(Go For Broke)설립하는등 수많은 사회봉사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사회활동은 전쟁영웅을 더욱 돗보이게 하였으며 우리는 오늘 그의 그림자인 혼다의원을 통해 종군위안부 결의안 통과라는 과실을 보게 된것이다.

그를 아는 분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군인으로서 김영옥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알렉산더 대왕 이후에 최고의 군인이다."
- 존 코백 미 육군 예비역 중령
"내 휘하에 있던 500만 군인 중에 최고의 군인이다."
- 마크 클라크 前 미 5군 사령관
"미 보병학교 시절 한국계인 김영옥 대령 덕에 어깨가 으쓱했다."
- 채명신 前 파월 한국군 총사령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닮았으면 하는 인물"
- 김영옥의 전기를 쓴 한우성

그의 업적만큼 훈장도 엄청나다.
이탈리아 - 최고십자무공훈장
프랑스 - 십자무공훈장(1950년), 레종도뇌르 훈장 (2005년 2월)
미국 - 무공훈장 등 10여 차례 받음
대한민국 - 국민훈장 모란장(2003년) 태극무공훈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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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벤드오브브라더스에서 흰 콧수염 날리던 "로버트 싱크"대령을 기억하시는지? 윈터대위를 인정하고 물심양면 잘 끌어 주셨던 그분! 그분이 한국전 당시 김영옥대령이 속한 7사단 부사령관이었다. 김영옥 대령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수많은 작전을 성공시켰다고 한다.
* 극중 로버트 싱크 대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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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재 로버트 싱크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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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42연대의 치열함은 전투 참전사에서도 나타나는데 특히 안지오 공략전은 최고의 정예들이 맞뭍은 전투였다.
- 2차대전
Naples-Foggia
Anzio
Rome-Arno
North Apennines
Rhineland
Po Valley
-걸프전
iraq

* 김영옥대령의 장례식 사진들을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 Wiki에서 442연대에 대한 자료를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 Wiki에서 100대대에 대한 자료를 보시려면 [여기]로 방문 해주세요.

2007/06/27 10:48 2007/06/27 10:48
뭐라 말할 수 없을만큼 아쉬운 F-117(F117)은 일반에 공개된 최초의 스텔스 폭격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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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텔스란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레이더의 반사면적을 최소화하여 레이더가 그것이 항공기라고 판단하지 못하도록하는 기술이다.
F-117이 이제 퇴역된데는 미국이란 부자 나라의 결정이지만 이기종이 데뷰한 1989년 파나마 전쟁부터 2007년 현재까지 참가한 전쟁만해도 파나마, 1차걸프전, 코소보내전, 아프카니스탄전쟁, 2차걸프전 등 5개의 전쟁에서 단 1대의 추락만 있었을 뿐일 정도로 생존성이 우수하다. (그 한대도 재수 더럽게 없어서 추락당했지만 말이다. 말로는 격추시켰다고 하지만 기계고장으로 추락한것은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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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당시로써는 엄청난 방향을 일으켰는데 방공담당들은 "스텔스 공포증"까지 생겼으리라 더군다나 북한의 예만 보더라도 북한과의 문제가 생기면 1980년대까지만해도 항공모함을 중심으로한 기동함대가 동해상에 떴지만 이제는 간단히 스텔스 1개 대대정도 와서 무력시위할 정도이니 1개 기동함대를 대체하는 엄청난 위력이었던것은 분명하다.
그때마다 북한이 "아~ 왜그래? 말로하자니까~"하며 뒤로 뺀걸 보면 이제 이 낯익은 녀석을 볼수 없다는것이 아쉽다.

스텔스라는 것은 사실 따져보면 엄청나게 오래된 기술이다.
최초의 시도는 독일의 U-보트부터 시작되었다. 당시에는 잠수기술의 한계로 수상으로 이동하다가 전투에 들어가면 잠수하는 정도였고 레이더기술의 선진국인 영국에서는 카타리나와 같은 수색 항공기에 레이더를 달아 잠수함을 미리 탐지하자 스텔스 도료로 잠수함을 칠한데서 시작되었다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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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전쟁말기 독일의 폭격기인 Ho IX를 만들며 레이더 반사면적을 줄이고 전파 흡수 도료를 바르다 전쟁이 끝난다.
* 제작당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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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보관되어 있는 모습. 아무리봐도 B-2 폭격기의 할아버지 정도 되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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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전쟁은 끝났고 그것을 선점한것은 미국이었다.
그렇게 잊혀지는 듯했던 스텔스 기술은 베트남전에서 다시 등장한다.
Q2 드론 정찰기는 알루미늄과 같은 금속 외피가 아닌 천을 덮고 베트남상공을 비행했다고 한다.
여기에 한걸음 더 나아가 D21은 스텔스 도료를 발랐다.
* Q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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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록히드의 D-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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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것이 1970년대 드디어 유인 항공기에 전파 흡수 도료를 도배하는데 그것이 SR-71이다.
(사실상 가장 오래된 스텔스 실용기는 SR-71이다)
* D-21을 테스트를 위해 상부에 태우고 비행하는 SR-71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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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로 F-117, B-2, F-22, F-35 등과 같은 스텔스 유인 전투기가 나온것은 다들 아시는 이야기일테고 그것보다 시도만 하다 포기한 것들도 있다.

* 스텔스에다가 음속 7에 도전했던 B58 테스트기 제작만으로 종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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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해군에 제안되었던 A-12 AvengerII 이놈도 시제기 제작만으로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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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스텔스 기술에 대해 얕은 지식을 풀어 보았다. 정말 오랜 시간 이어져온 기술이다.
1940년대에 개발되다만 기술을 그 가능성을 보고 투자한 미국도 대단한 나라이다.
최고의 스텔스기는 앞으로 F-22에게 내어주었지만 이런 명작이 나오는데 들어간 눈물과 땀, 막대한 자금. 그리고 그 뒤에서 기술적 토대가 되었던 수많은 테스트기체들을 생각하면 명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지 세삼 느끼게 되는 이야기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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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정리하고 보니 스텔스기는 거의  록히드 마틴사의 제품이다!!
SR-71 : 록히드 마틴
F-117 : 록히드 마틴
F-22 : 록히드 마틴
F-35 : 록히드 마틴
B-2 : 노스롭그루먼사
2007/03/22 10:51 2007/03/22 10:51

2차 세계대전이후의 전쟁에 관해서는 어느정도 공부했다고 자부하지만 고대전쟁은 사실 너무나 어려운 이름때문에 포기하고 있는데 영화 "300" 본인의 가슴에 불지르고 말았으니.. T_T

"300"의 배경은 유명한 마라톤 전쟁(BC490)후 10여년이 지난 BC480년에 발생한 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중에 일어난 "테르모필라이"전투를 소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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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지도에서 붉은 점선이 페르시라군의 기동로이며 본 전투는 전쟁 극초기에 발생한 전투이다. 그리고 알려진바와 다르게 "유보이아"근해에서 발생한 폭풍으로 페르시아 함대가 약해질데로 약해진점이 결국 패인이었다는게 내 생각이다.
생각해보라. 100만의 대군을 먹일려면 얼마나 많은 식략이 필요할 것이며 그 식량을 도보로 운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결국 배로 날라야 하는데 이 함대가 폭풍에 한번 심하게 두들겨 맞아 약해졌고 약해진 함대는 "살라미스"에서 결국 격침당했다.
결국 쌀배달하는 함대의 격침으로 100만대군은 쫄쫄굶게 되고 그리스의 반격으로 결국 지게 된다.

또한 영화속에서는 300명만이 100만대군과 싸우는 것으로 나오지만 실재로는 7천의 군대가 방어선을 형성하였다. 원래는 그보다 더 북쪽에 있는 테살리아에서 1만으로 방어하려하였지만 마침 그리스는 올림피아드중이라 군대를 모집하기가 쉽지 않았기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연합군 7천을 모아 "테르모필라이"에 모인것이다.
여기서 또하나 역사에서는 육군주력인 스파르타의 결정이 아님을 보여준다. 당시 해군을 막아야 했던 아테네가 여기가 아니면 우리 전쟁안할레! 하며 강력히 주장했던것을 받아들인 결과다.
레오니다스왕이 지휘하는 스파르타의 팔랑크스가 전면을 방어하고 2일이나 강력한 페르시아군을 막아냈다.
2일동안 레오니다스왕과 스파르타의 300명이 죽인 수가 1만이었으나 100만의 대군에게는 1%의 손실에 불과했다.
다음은 그리스군의 팔랑크스를 묘사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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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렇게 한줄 한줄 겹치면 이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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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짧은 글라디에터를 가진 로마군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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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백년 후의 로마군대 밀집대형. 무너지지 않게 뒷병사가 앞병사의 갑옷을 잡고 대형을 유지한다.]

여기서 잠깐. 세상많이 좋아졌다. MS가 제공하는 버츄어 어스로 한번 그 협곡이 얼마나 좁은 곳인지 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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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리스의 주요 도로망인것이 놀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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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곡의 규모가 보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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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군방향에서의 협곡이다.]

그러던중 "에피알테스"란 자가 페르시아군에게 샛길을 알려준다. (지금도 그리스에서는 최고의 욕이 에피알테스라고 한다.)
앞뒤로 포위를 당한 레오니다스왕은 1,000명을 남겨두고 나머지 6,000의 군대를 제2의 방어선 구축을 위해 퇴각시키고 자신과 스파르타군 300명은 그들에게 후퇴할 시간을 벌어주기위해 남는다.
같이 남아 있던 테베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항복하였고 레오니다스왕과 300인은 그곳에서 최후를 맞았다.

한편 그리스해군 연합군은 이순신 장군의 명랑해전과 같이 유보이아(EUBOEA)섬 북부 "아르테미시움"해협에 갖혀서 낑낑거리는 페르시아 쌀배달 해군을 막아내고 있었고 페르시아군은 분통을 터트리며 우회공격하기위해 내려가던 200여척의 기동함대는 폭풍에 말려 끝장난다.
육군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육해군 협공의 위험으로 결국 철수하고 후에 그리스 남부 "살라미스"에서 결정타를 먹인 끝에 전쟁의 승리의 깃발을 가져오는데 성공하였다.

* 다음은 전체 전쟁지도이다. 그리스 반도옆에 찰싹같이 불어 있는 섬이 유보이아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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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보이아 섬북부지역 확대사진이며 북부에서는 연합해군이 방어선을 폈고 우회함대는 태풍만나 안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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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스의 육상방어선이 무너지자 그리스함대는 철수하였고 그 여세를 몰아 그리스 반도의 남단을 돌아 살라미스까지 갔지만 거기서 그리스 해군에게 캐관광당하고 GG쳐버리자. 페르시아 육군은 배고픈 배만 부여잡다가 결국 GG쳐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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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너무 많이 외곡되어 있기는 하지만 뭐 재미로 봐줄수 있는 부분아닌가?
또한 영화와 달리 300명만 싸운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희생으로 6천의 목숨을 살린 것은 사실아닌가?
결국 이 6천의 군대가 그리스를 구하게 되는 계기였고 그들의 버린 목숨으로 나라를 구한것. 그것 자체로 그들은 존경받아야 한다.

그러나 전체적인 전황이나 기타 다른 요소를 고려하지 않고 "300명이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라는 부분에 Focus만 맞춰 이야기를 논한다면 결국 단세포적인 생각으로 이런 헛소리만 나오게 되는 것이다.
"제국의 6군단은 스파르타의 300명 병사와 비견할 만했었다. 그들의 이번 항복은 독일군이 레오니다스가 되는 걸 방해하고, 나아가 제2의 테르모필라이로 기록될 영광의 패배를 놓친 것과 마찬가지다. 수치다."  - 아돌프 히틀러-
이미 자신의 권력욕과 정복욕을 채우기 위해 죽은 이름모를 병사들에게 히틀러의 단편적인 단세포는 다시한번 죽음에 몰아 넣고 있다.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하지 않기위해서라도 역사의 전체를 알아야 하는 것이며 단편적인 역사는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2007/03/20 10:43 2007/03/20 10:43

1978년 2월 「키프로스」에서 이집트 대통령(당시)「사다트」의 절친한 친구 한명이 암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30명의 인질을 잡고 키프로스 정부로부터 DC-8 여객기 한대를 뜯어낸 암살범 두명은 인질 18명과 함께 다른 나라로 도망가려 했지만 근처 어느나라도 이들의 비행기를 착륙하게 놔두지 않았다.
결국 지중해를 빙빙 돌다 키프로스의 「니코시아」로 되돌아간 범인들은 키프로스 정부와 지루한 협상을 시작했다. 지루한 협상이 슬슬 타협점을 찾아가던 그날 밤, 한대의 C-130수송기가 니코시아 국제공항 활주로에 날아들었다. 45명의 이집트군 특공대 「사이카:번개」부대를 태운 이집트 공군 수송기였다.

투철한 복수심에 불타는 이들 사이카대원들은 인질을 구출하고 범인들을 처치하기 위해 DC-8기에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키프로스당국과 전혀 협의가 없었고 이집트군이 탑승한 수송기의 착륙조차 허락을 받지 않았다. 당장 키프로스군과 경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키프로스군과 경찰로서는 아무말도 없이 남의 나라 땅에 뛰어든 이 험악한 친구들은 아무리 봐도 테러리스트들의 일당이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원래는 부대 이름마냥 `번개처럼` 끝났어야 할 구출작전은 RPG-7과 중기관총이 난무하는 `전면전`으로 변해버렸다. 이집트군의 C-130이 RPG-7에 맞아 불타올랐고, 곳곳에서 비명과 신음소리가 울려퍼지는 생지옥이 펼쳐졌다.

간신히 전투가 끝난 뒤 15명의 이집트군 특공대원의 시체가 활주로에 뒹굴고 있었고, DC-8기내에도 인질 모두의 시체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범인 두 명은 키프로스 정부에 항복했고 나머지 이집트 특공대원도 전부 키프로스군의 포로가 되어버렸다. `이집트판 엔테베의 기적`을 바라던 이집트군의 야망은 아주 보기좋게
짓밟혔지만 이걸 보는 세계 각국의 반응은 냉담했다.

이집트 정부는 간신히 석방되어 돌아온 대원들을 영웅으로 대접하는 한편 키프로스정부를 피도 눈물도 국제협력도 모르는 악당으로 몰아붙이면서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 했지만 누가 봐도 이집트가 잘못한 건 확실했다 여기서 미국의 입장에서는 막 미국편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이집트를 자극하기 싫었고 결국 명백히 실패인 이 작전을`테러리스트와 타협하지 않은 용기있는 행동`정도로 평가해 이집트의 비위를 상하지 않게 하려 애썼다.

누가 봐도 대테러작전의 아마추어인 이집트군 특수부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이카부대를 777부대로 개편하고 미국 SEAL 6팀이나 델타포스, GIGN, SAS같은 쟁쟁한 각국 대테러부대에서 교관을 초빙해 훈련의 강도를 높여나갔다. 최고의 교관들을 초빙하고 훈련을 거듭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집트군 특수부대에 관한 평가는 여전히 좋지 못했다.

그 유명한 전직 SEAL 대원이자 초대 SEAL 6팀 대장 「리처드 마친코」는 저서 「로그 워리어」를 통해 "이곳 장교들은 여전히 아랍귀족들처럼 모든 것을 아랫사람들에게 맡긴 채 손 하나 까딱 안하려 한다"며 777부대를 혹평했고, 다른 나라 교관들로부터의 평가도 결코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장비에도 상당한 비용이 투자되고 실력이 꽤 좋아졌다고 여겨지던 1985년 10월, 마침내 이들이 정말 실력을 쌓았는지 검증할 기회가 왔다.

1985년 10월 110여명의 승객을 태운 이집트 항공 소속 보잉 737기가 지중해의 섬나라 「말타」에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들에게 납치당했다. 이번에야말로 7년전의 굴욕을 갚아보겠다고 벼른 777부대는 당장 말타로 향했다. 이번에는 이집트정부도 7년전보다 똑똑해져서 말타정부에 회유반 협박반으로 설득을 거듭한 끝에 777부대가 말타에서 구출작전을 벌여도 좋다는 허락이 간신히 떨어졌다.

777부대원들은 기체를 포위하고 곳곳에 도청장치를 붙이는 동시에 석방된 몇몇 승객들로부터 기체 내부의 정보를 얻는다는 고전적인 순서부터 작전을 시작했다. 적어도 시작은 이처럼 지극히 교과서적이고 모범적이었지만 충분한 정보, 심지어 보잉 737기의 기내구조마저 제대로 파악하기 전(자기네 항공사의 여객기임에도 불구하고 777부대는 보잉 737기의 내부구조에 대한 사전지식이 거의 없었다)에 구출작전 개시명령이 떨어졌다.

이집트 정부가 777부대에 빨리 작전을 끝내서 인질을 구출하라는 압력을 계속 넣었고 777부대장도 자신했기
때문이었을까? 777부대는 테러리스트의 숫자나 위치, 인질의 위치나 상태 등도 충분히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어둠을 틈타 작전을 시작했다. 이들의 계획은 간단했다.

테러리스트들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기체 위에 폭탄으로 구멍을 뚫은 사이에 날개 옆의 비상구를 폭파하고 부대가 돌입한다는 것이다. 이론상으로는 별로 나쁘지 않은 계획이지만 문제는 기체 위에 테러리스트들 몰래 폭약을 설치한 것은 좋았는데 구멍을 확실하게 뚫는답시고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폭약을 붙여버린 것이다. 엄청난 폭약과 함께 기체 위에는 큼직한 구멍이 뚫렸고, 그 바로 밑에 있던 인질 20명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당연히 기내는 엄청난 연기와 폭음, 먼지에 휩싸였고 이게 가라앉을때까지 기다린답시고 90초나 돌입을 미루는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돌입한 777부대는 또한번 엄청난 짓을 저질러 버렸다.
기내에 대인살상용 파편수류탄을 던지며 돌입한 것이다.

순식간에 기내는 피로 물들었고 그것도 모자라 777부대는 기내에서 움직이는 모든 것에 사격을 퍼부었다-누가 인질이고 테러리스트인지는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문자 그대로 아비규환이 되어버린 기내를 몇몇 승객이 탈출하는데 성공했지만 이들을 향해 가차없이 총탄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이들을 쏜 것은 어이없게도 이집트군 스나이퍼였다. 여객기 밖으로 뛰어나온 인질과 테러리스트를 구분할 생각도 없이 무차별 사격을 퍼부어 버린 것이다. 이미 사태는 `실패한 구출작전`의 단계를 넘어 `무차별 학살극`이 되어가고 있었다.

간신히 연기가 걷히고 총성이 잦아든 다음 모두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은 실패라는 말조차 과분한 참담한
상황이었다. 활주로와 기내에 뒹굴고 있는 인질의 시체는 57구-인질의 절반이 넘는 숫자였고 부상자까지 합치면 인명피해는 90여명-거의 모든 인질이 죽거나 다쳤다.

구출작전이 아니라 숫제 인간사냥을 한 것같은 이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더 어처구니없게 만든 것은 이집트 정부와 미국의 태도였다. 이집트는 이 작전을 `성공`했다고 평가했고, 미국 정부는 이번에도 `테러리스트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은 용기 있는 행동`으로 추켜세운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후 이집트정부에 대해 인질극을 벌이려는 세력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2006/07/22 05:15 2006/07/22 05:15

2000년전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변치 않는 인간의 행위가 있는데 "먹고","입고","싸고","자고","번식하고","싸운다"입니다.

먹는 것은 외식업으로 각종 먹거리 사업으로 발전하였고 입는것도 각종 의류 사업으로 싸는것 역시 각종 오폐수 수거 사업에서부터 요업, 화장실 변기 사업으로 자는 것은 건축업으로 번식은 결혼중개, 싸움은 군대로 발전해왔을 뿐인것이죠.

이제 하나씩 뒤벼 볼까요?
첫째, 병력의 숫자보다는 일시에 많은 화력을 퍼붓는 쪽이 이긴다. 즉, 진형의 표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이길 확률이 높다는 이야기입니다.

전장은 점과 점이 만나서 생기는 것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현대까지 변치 않는 특징. 단지 변한것은 무기의 사거리 변화로 거리가 늘어난것 밖에 없죠.
이 그림을 보면 명확해집니다. 아무리 많은 군대라 해도 적과의 접점에 있는 병사의 수는 정해져 있고 그 뒤에 있는 병사들은 앞에서 무슨일이 벌어지는지 알고자해도 알수가 없습니다. 즉, 뒤에 있는 병사들이 투사할 수 있는 화력은 전무하고 최전방에서만 화력을 주고받는 형태이므로 접점의 병사수가 많은 쪽이 이길 확률이 높아 지는 것입니다.

가령 예를 들어 A군 10명 B군 8명이 싸운다고 치고 명중률은 50%로 같다고 합시다.
첫번째 교전에서 A군 10명이 B군 5명을 살상하고 B군 8명은 A군 4명을 살상합니다.
그럼 남은 병사는 A군 6명 B군 3명입니다.
두번째 교전에서 A군은 B군을 전멸시키고 B군은 1.5명을 살상하여 A군은 4.5명이 남습니다.
결국 2명의 차이로 시작한 전투는 최후에는 4.5명 (0.5 맞은 병사 후에 전사로 4명)의 차이를 내게 됩니다.
1967년 극적인 짜빈동 전투를 예를 들면 1개 중대에 1개 연대가 공격을 개시하였습니다. 주공은 북서이며 동남쪽에서 양동 그리고 나머지 지역에서의 도발이 있었다는 것을 사상자 분포도를 통해 알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1개 중대가 방어하는 방어진지의 승.
포병을 비롯한 압도적인 화력의 승리였습니다.

둘째, 정보를 장악하는 쪽이 이긴다.

독일군은 에그마라는 작품을 만들어 놓고 이거 전쟁 끝날때까지 그대로 믿고 있다가 연합군의 암호해독 기술에 간파당해 움직임을 다 읽혀 버립니다. 스타크레프트에서 맵핵쓰는것과 같죠.

셋째, 기동성이 우월할 경우 승리의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병력이 수가 적음에도 기동력으로 전장을 승부한 곳이 있었습니다. 근대전쟁의 예로 1940년 벌어진 구소련과 핀란드의 겨울전쟁입니다.
겨울전쟁에서 핀란드는 장작전술로 적의 병력을 "나누고","깬다"라는 개념으로 수많은 현대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던 구소련군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눈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전차는 화염병으로 부수고 참호에 틀어박힌 보병은 뛰어난 저격술로 보냈습니다. 그러나 봄이 오고 눈이 녹으면서 핀란드군의 자랑이던 기동력에 큰 타격을 입고 결국 항복하였지만 기동력이 화력과 방어력을 압도 할 수 있는 전형적인 예입니다.

넷째,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다.
현대 제국주의가 물러간 시대에 전쟁은 승자도 패자도 없게 만듭니다. 저 관에 누워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한때는 자랑스러운 아들딸이었을것이며 무적의 아버지 어머니였을 것이고 누군가가 사랑하던 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꿈을 꾸며 인생을 살아가던 이였겠죠.
2006/04/25 13:29 2006/04/25 13:29

* 1979년 공군발행 잡지 기고글중 당시 편대원이었던 서상순씨의 기고입니다.

공비토벌출격기 - 가야산 해인사를 중심으로 - 서상순

1950년 6월 25일 북한군들은 막강한 대군으로 일거에 남한을 파멸시키려 하였으나 유엔군과 국군의 반격으로 3개월이 못되어 그 야망을 여지없이 분쇄시켰었다.
그들은 막대한 인명의 손실은 물론 보급품, 장비, 대전차포까지도 모조리 버리고 도망쳤으나 퇴로가 막힌 패잔병들은 남한 각지 산악지대에 숨었으며 지리산에서는 6천 5백, 가야산에는 9백여명이 모여 후방 치안을 교란시키고 인근 지역을 위협하였다.

서남지구 특별경찰대가 지리산 공비토벌에 임하였으나 장비와 수적인 미흡으로 임무수행이 어려워 1951년 7월부터 우리 공군이 합동작전을 폈으며, 그 해 12월에 육군도 가담하여 지공 합동으로 토벌전이 전개되었다. … (중략) …

그해 12월 18일 있었던 일이다. 며칠 계속되어 내린 진눈깨비로 공기가 습하고 지리산 높은 골짜기마다 안개구름이 깔렸으나 동쪽 아롱산 능선 사이로 눈부신 아침 해가 밝아와 그동안 피로를 푼 전투조종사들은 마음대로 푸른 하늘을 날며 종횡무진 곤두박질치며 마음껏 때려부수고 싶은 감정에 설레었다. 6시 30분 아침식사가 끝났을 때 벌써 작전참모 장지량 중령이 직접 적정을 공중정찰하고 돌아와 ‘찌르릉’ 하고 긴급출동을 알리는 비상벨이 울렸다.

아직까지 전례로 보아 우기에는 아군이 불리하고 맑은 날에는 승전하였으며, 또 야간에는 적이 활기를 띠고 주간에는 아군이 전승하였으니까 말이다. 경찰부대로부터 긴급 지원요청을 받았던 것이다.

[당시 대한민국 주력전투기 P-51(F-51) 무스탕]

나에게도 출격명령이 내렸다. 얼마 뒤 우리 편대기들은 낙동강 줄기를 따라 북상하다가 비행지휘관 김영환 대령이 인솔하는대로 함안 상공에서 기수를 산악지대로 돌려 얼마 안가 협천 상공 8백feet에서 ‘모스키토’(미 5공군 정찰기명)와 만나라는 무전명령을 받았었다.

우리 4기 편대는 김대령의 1번기, 2번기가 강호륜, 3번기가 박희동, 4번기가 필자 등 강팀이었다. 정찰기의 훈령은 가야산 동남으로 산줄기와 산줄기, 계곡과 계곡 사이로 조그마한 냇물이 흐르는데 그 중 한 능선이 흐르다가 양쪽으로 갈라지면서 울창한 산림을 이루어 삼태기 모양의 형국 안에 온화하게 보이는 분지에 소복히 내려다 보이는 사찰과 인근의 소굴을 폭격하여 지상군을 지원하는 것이다. 편대장 김영환 대령의 38호기가 정세를 일독하고자 ‘모스키도’ 뒤를 따라 계곡으로 급강하하였다.

* 아래 모스키토 전폭기로 알고 있었으나 "모스키토"는 FAC(전선통제기)의 암호명이었다고 함.
당시 FAC역할은 T-6G형이 맡고 있는것으로 확인되어 정정합니다.

[암호명 모스키토는 FAKE... 2차 대전당시의 모스키토전폭기/정찰,폭격,공중전 다목적으로 써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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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진짜 "모스키토"는 바로 T-6G형]

그러자 사찰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당황히 숲속으로 도피하는 모습, 잘 위장된 참호며 능선을 따라 곳곳에 구축된 진지 등 공비들의 불야성이라 할 수 있었다. 계곡 동쪽 신작로를 따라 긴 언덕 위에 아군임을 알리는 주홍색 T자형 대공포판이 깔렸는데 그 곳에 진을 친 지상군이 손을 흔들며 기뻐했다. 우리들은 각각 500파운드 폭탄 2개, 5촌 로케트탄 6개, 캬리바 50, 기관총 1,800발씩 장비하였고 기장만은 750파운드짜리 네이팜탄을 무장하고 있었다. 드디어 정찰기의 목표 제시용 연막탄이 바로 해인사 큰절 마당에 떨어져 백색 연막이 선명하게 목표를 가리켰다.

네이팜탄 한발이면 온 사찰을 잿더미로 바꾸고 각기의 무장으로 공비의 소굴을 뿌리뽑을 수 있어 우리들의 마음은 전의에 부풀었다. 이윽고 편대장기가 급상승 선회하며 요기에 명령했다.
“각 기는 편대장의 뒤를 따르되 편대장의 지시없이 폭탄과 로케트탄을 사용하지 말라.”

그리고 기관총만으로 사찰 주변의 능선을 소사공격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명령대로 교묘히 위장된 적의 아지트를 찾아 소사하여 큰 타격을 주었으며, 산정에서 계곡으로 마침내 궁지에 몰린 적이 우왕좌왕하고 사찰 주변으로 몰리며 숲 사이에서 최후 발악인 양 우리들에게 지상 포화를 퍼붓고 있음을 알았다. 이때 또다시 정찰기에서 독촉훈령이 라디오를 통해 내렸다.
“해인사를 네이팜과 폭탄으로 공격하라. 편대장은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잠시후 사찰이 불바다가 될 것을 생각하자 통쾌감마저 앞섰다. 그때,
“편대장님, 많은 적이 해인사로 몰리고 있습니다.”
나는 빨리 공격하자고 재촉보고를 하였다.
“각 기는 공격을 하지 말라.”
하고 대장님의 날카로운 명령이 다시 라디오를 통해 들렸다.

“라자, 라자.(알았습니다)”
하고 또 명령에 따르자 일렬종대로 해인사를 향해 동에서 서로 법당 용마루를 지나면서  ‘대적광전(大寂光殿)’의 간판도 똑똑히 보였다. 숲 속에 많은 적이 모여 앉은 것을 보고 얄미워 로케트탄의 세례를 퍼붓고 싶은 충동도 있었으나 급상승 선회하다가 그뒤 해인사 뒷산 몇 개의 능선을 넘어 폭탄과 로케트탄으로 적을 무찔렀다.

그날 저녁 일이다. 미 공군 고문단의 XX장교가 공지합동작전본부에서 장교를 대동하고 왔는데 편대 전원이 전대장실에 모였다.

냉랭한 분위기에 공지합동작전에서 왔다는 소령이 오늘 가야산 목표를 유도한 정찰장교였다고 소개하므로 나는 오늘의 명령불응을 직감했다. 그는 심각한 어조로,
“오늘 저에게 불찰이 있었습니까? 무슨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김영환 장군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니요, 오늘은 아주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고 묵직한 태도로 대답하였다.
“그런데 목표를 알리는 연막탄의 흰 연기를 보셨습니까?”
“네.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엉뚱한 곳을 공격하더군요. 왜 제가 공격을 중지하고 귀대하라고 훈령하였는지 아십니까?”

김대령님의 온화한 눈초리를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소령께서는 지상군의 요청에 따라 목표를 지시하였겠지만 그것은 사찰이 아니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사찰이 전쟁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김대령님은 국가보다도 사찰이 더 중요하다는 말씀이시군요.”

“아니지요. 사찰이 국가보다 중요할 것이야 없지요. 그러나 공비보다는 사찰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공비란 어디까지나 유동물(流動物)입니다. 그들은 일정한 전선을 형성하지 않고 있으며, 일단 그 지역에서 몰아내도 다시 침입해 오는 것이 특징이 아니겠오? 따라서 지리산 지구가 밤에는 인민공화국이요, 낮에는 대한민국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니겠오.”

“그러면 김대령님은 공비들을 언제까지나 방치해 두자는 것이 아닙니까?”

“천만에… 해인사는 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그들이 현 정황으로 장기간 유지해 나갈 수 없는 독안에 든 쥐! 단지 놈들이 지리산 근거지로 통하는 통로에 불과하다고 봅니다. 무엇보다도 그 사찰에는 공비와 바꿀 수 없는 팔만대장경이란 세계적인 국보이며,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인 문화재가 있습니다. 가야산에 출몰하는 공비 몇 백명을 살상하였다 해서 전쟁을 판가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절은 1,300년의 역사가 있고 고려 고종 24년에서 38년, 15년에 걸쳐 8만여면에 달하는 대장경을 판각해(750년전) 봉안하 우리나라 국보사찰입니다. 소령께서도 가장 가까운 예로 2차 대전때 유럽의 파리와 일본의 동경을 폭격하지 않은 실정을 아실 것입니다. 그 처참한 대전에서도 이 도시들은 총탄 한발 맞지 않고 오늘도 그대로 인류의 귀중한 문화재로 남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우리들의 공중 공격을 받고 사찰로 모여든 사람들은 반드시 납치되었던 양민들이 공습을 틈타 적에게서 벗어나온 사람들이 틀림없습니다. 또 지상군의 보고도 그렇습니다.”

그 말씀에 나는 과연 편대장님의 판단이 정확한데 또다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 그 소령은 얼굴에 누그러진 미안한 빛을 띠우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부동자세를 취하고 손을 들어 경례를 하며 이해와 존경을 표시하고,
“김영환 대령님 같은 훌륭한 상관을 모신 대한민국의 공군 장병들이 부럽습니다.”

- 미군에서 모스키토를 운용했다고 하는 부분은 좀 틀린부분 같습니다. 아마도 미 공군소속으로 영국군이 파견되어 운용되지 않은게 아닐까 합니다.

2006/03/23 15:36 2006/03/23 15: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