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사의 모든 질서가 붕괴된 난세에는 영웅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아니, 질서 없이 살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운 질서를 욕망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을 이끌어주고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줄 Leader를 원한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 같다.

300년쯤으로 시계를 돌려보면 프랑스가 그러했다.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설 그때,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졸업성적이 뒤에서 세는게 더 빠른 어떤 포병부대 대위가 있었다.
그 카오스한 상황에서 고향 코르시카 독립운동한다며, 탈영에 가까운 돌립운동하다 탈탈 털려서 잠적한 그였다.
(물론 출처 자료에 따라 중위, 대위라는 주장 등 2가지 상이한 주장으로 갈리지만, Wiki 에 근거하여 대위로 설정한다.)

프랑스혁명 4년차인 1793년의 프랑스 상황을 보자면,
- 1972년 12월 영국은 프랑스로의 곡물, 원자재 수출금지
- 1월 런던주재 프랑스 공사 추방
- 2월 국민의회는 만장일치로 만고불변의 숙적 영국에 선전포고한다. (당시 연전연패 하고 있던 오합지졸 프랑스군의 사정을 보자면 만용이었다.)
- 이에 영국은 즉시 대륙연합 예산을 편성하고 나폴레옹이 제거될 때까지 유럽대륙 연합군의 자금을 덴다. 
* 물론 이전 왕정에서 부터 내려오던 만성적인 재정적자와 "아시냐" 지폐(가치에 비해 3.3%만 인정받고 없어진.. ) 등 각종 문제가 계속 해서 내려오는 상황이었음.

영국에 선전포고하는 국민의회의 만용을 보자, 오히려 왕당파쪽에서 충분한 명분이 되었고,
혁명으로 군에서 쫒겨난 정치가, 군인들의 연합으로 손쉽게 남부 프랑스 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른다.

이중에 가장 중요했던 전략요충지가 바로 툴롱이었다.
툴롱은 한국으로 치자면 "진해" 정도되는 해군력의 50%가량이 밀집한 전투함 70여척의 모항이었던 것이다.

일단, 혁명군은 다른 지방도시부터 탈환하고 왕당파들을 숙청하기에 이른다.
문제는 여기서 부터 시작이다.

앞서 이야기한 바대로 툴롱이 프랑스 해군의 가장 큰 해군 기지였기 때문에 이 앞에는 영국과 스페인 연합함대가 12척의 전함으로 진을 치고 봉쇄하고 있었다.
8월 28일 왕당파는 다른 지역의 진압소식을 듣고는 바로 외세를 끌어들이기로 결정, 영국과 스페인 연합함대를 툴롱으로 입항 시킨다.

영국입장에서는 견제하라고 내보냈더니 본진까지 그냥 무혈입성하는 꼴! (당시 프랑스 툴롱에는(70여척이 항구에 있었다. 70여척이!)
입에다 넣어준 떡을 누가 받아 먹지 않겠는가?
결과적으로 왕당파와 합세한 연합함대는 지상군 수비병령 22,000으로 늘어났다.

당시 진압군은 아비뇽과 마르세이유를 탈환하고 9월 8일 툴롱 서쪽에 도착한다.
이때, 사령관은 흔히들 미술가 출신이라고 알고 있는 "장 프랑스와 카르토"장군으로 9세에 군복을 입고 보병과 용기병의 경력을 가지다, 그림쟁이로 나름 이름을 날린 군인이었다.
하지만, 그는 화력전보다 Line to Line 의 전술에 능한 장군이었다는게 프랑스군으로써는 불행이었고, 나폴레옹에게는 행운이었다.

카르토 장군은 가장먼저 올리울스(Ollioules) 고지를 점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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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후대에 평가가 절하되기도 하지만, 전략가라면 누구나 짚어줄 교통의 사통팔달 지역으로 툴롱 항구까지 약 6km, 바로 앞에는 툴롱까지의 시야가 확보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하지만, 카르토는 전술한바와 같이 그의 한계는 여기까지이다.

공격군은 방어군의 3배가 되어야 뭘 해먹는데... 그는 겨우 32,000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을 뿐이다.
다시말해, 약 1.5배의 전투력밖에 보유하고 있지 못했고, 전함의 수를 본다면 화력에서는 오히려 비등비등한 수준이었다.

야사에서는 그가 화포사거리를 몰라서 여기서 포를 올려다 놓고 화력전을 수행할 생각이었고 그걸 나폴레옹이 반대하였다고 하지만, 참고자료를 뒤져보고 앞뒤를 맞춰본 결과 화력의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자신의 한계로 인해 더 이상 진격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울리우스에 배치된 포가 겨우 1개 포대였다고 확인되는데, 당시 1개 포대라 해봤자 겨우 6문에 불과한 전장식 포이다. 다시말해 그냥 견제용... ㅡㅡa) 

암튼, 이러한 상황에서 남부에서 탄약수송이나 하던 나폴레옹이 온다.
이 상황도 조금은 우연이라 생각되는게, 카르토 장군의 정치장교였던 살리세티는 코르시카 출신으로 나폴레옹의 동향이었고, 마침 포병지휘관인 동마르탱이 부상을 입어 그 자리가 비었었다. (그가 탄약수송임무를 수행했었던 일도 후일에는 엄청난 행운이었다는걸 후에 설명하겠다.)

작전회의에서 아마도 그는 툴롱항을 봉쇄할 수 있는 지점을 공략하자고 했던 모양이다.

나폴레옹이 병력 1천명을 주면 공략해서 이길 수 있다고 이야기한 곳이 바로 항구입구에 존재하는 레뀌에뜨 요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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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의 지도로 본 그 때 그 지역, 사거리 2Km의 포로 항구 안쪽에 있는 대부분은 사거리안에 들어온다. 최고의 요충지이지만, 대규모 함대가 존재한다면 한방에 몰살당할 수 있는 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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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낙하산으로 내려온 나폴레옹을 믿지 못한 카르토 장군은 병력 5백을 내어주었고, 결국 이 작전은 실패한다.
문제는 이 지역의 중요성을 연합함대가 뒤 늦게 깨달은데 있다.
이에 연합함대는 레뀌에뜨 요새 전면 진압군의 진격로 상에 멀그레이브 요새를 증축하고 3개의 작은 방어 진지를 신설한다.

나폴레옹의 입장에서 보자면, 전략적 요충지에 집중해야할 때 자신의 전략을 몰라주는 카르토 덕에 일이 더 커지게 된것이다.

그러자 그는 곧 자신의 상관을 바꿔달라는 요청서를 자신의 연줄을 통해 정치가 빽들에게 보낸다.
그에 대한 회신으로 카르토 장군은 짤리고 의사 출신 도페 장군이 오지만, 전장터에서 자신의 부하들이 포화에 두동강 나는 모습을 보곤, 전장을 떠나버린다.
세번째로 부임한 뒤고미에는 나폴레옹에게 포병 전권을 주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능력을 높이샀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9월 툴롱 전역에 도착한 나폴레옹은 1차 공략전이 실해하고 멀그레이브 요새의 축성과 진지강화를 바라보며 보병 돌격보다는 자신이 이전에 수행했었던 임무인 탄약수송 임무를 통해 샅샅히 알고 있던 무기고의 위치와 포의 수량 정보를 가지고 주변에서 약 300문의 포를 모으고 전직 포병장교, 포병출신 사병들을 징발한 상태로 약 1달 동안 단 6문의 1개 포대를 300문의 50개 포대로 증강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지휘권을 받은 나폴레옹이 한일이 가히 놀라울 정도인데, 그는 공성을 위해 포병진지를 하나 씩 늘려서 천천히 진격하는 전법을 채택하고,
11월 20일 자코뱅이라는 포병진지를 만든 이후 28일에Hommes-sans-peur 진지를 12월 14일에Chasse Coquins 진지를 만들어 압박한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앉아서 두들겨 맞는 쪽은 영국과 스페인 군이요. 가만히 피해없이 포탄만 날려대는 쪽은 진압군 쪽이니, 연합함대와 왕당파는 진지를 빼았기 위해 돌격하게 된다. 물론 공격군은 격퇴당하고 오히려 영국의 오하라 장군이 포로신세로 전락하게 된다.
12월 16일 충분한 포병화력을 확보한 프랑스는 총 병력 6000으로 총공격에 나서고 새벽3시쯤 1천의 피해를 입고 마침내 전략적 목표가 달성되게 되었다.
마침내 항구에서 가만히 앉아 포에 맞느니 영국과 스페인 연합군은 태울 수 있는 왕당파를 배에 태워서 철수하게 된다.

영국은 철수하며 프랑스해군 함정 70여척중 15척은 나포하고 (2배 장사!) 나머지는 불에 태워 제거한다.
(이후 영국은 프랑스에 대해 해군 우위를 확보하게 되고 수 년의 시간이 흐른 뒤 결국 나폴레옹을 파멸로 이끈다.)
배에 올라타지 못했던 왕당파 1천명 이상이 진압군에 보복 학살 당하고,
나폴레옹은 이때의 활약으로 무려 준장 (별 하나) 계급을 달게된다.

오늘 몇몇 사료를 분석하고 해외사이트를 뒤져가며 김창준님이 가지고 계신 고민에 대해 분석해보았다.
내 해석은 이러하다.

- 전략적 관점에서 툴롱은 자립이 불가능한 포위상태였고, 그들이 살 길은 항구를 봉쇄중인 영국 스페인 연합함대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다.
- 당시 주력이었던 24파운드 포는 현대 기준으로는 경량포이지만, 당시의 수송능력을 볼때 중포에 해당하고, 사거리는 2Km 안밖이었다.
- 나폴레옹은 전역에 참가한 이후 처음부터 전략적 목표 달성은 영스페인 연합함대의 추출이었고, 그는 항구의 폐쇄만이 그 목표를 달성하기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다.
- 하지만, 카르토는 보병/용기병 출신으로 방어진지 하나씩 돌파해 가는 정공법을 채택하게되고 결국 긁어 부스럼 만든 격으로 멀그레이브 요새등 방어를 강화시키는 꼴이 되고 만다.
- 나폴레옹은 이 작전에서 공훈을 세우지 못하면 또 한직은 전전해야 하는 신세였고, 그는 지금까지 한직에서 쌓은 정보와 인맥을 동원해 인근 지역의 무기고를 털다시피해서 최종 300문의 포를 모았다.(그의 신기에 가까운 업적은 후술한다.)
- 하지만, 카르토는 나폴레옹의 화력전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고, 보병돌격 등의 삽질만 강행했다. (당시의 머스킷의 화력 명중도 등을 고려한다면, 1~2방 쏘고 보병돌격이 일반적이었다.)
- 카르토가 짤리고 나서 도페장군이 오지만, 곧 전장을 떠나고 뒤고미 장군은 이러한 나폴레옹의 화력전을 찬성하고 포병지휘권을 나폴레옹에게 일임한다.
- 나폴레옹이 택한 전략은 전형적인 공성전이었다. 한칸 씩 전진하고 포병으로 적 진지를 때리는 방법이다.
- 위의 예는 영화 라스트 모하칸에서 상세히 묘사된다.


- 현대전에서도 대규모 공성전이 존재했는데, 멀리 독일군이 세바스토폴에서 만슈타인은 1300문의 화포를 집중하여 공략에 성공한다. 가까운 예로는 프랑스의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민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의 요새를 하나씩 공략하고 부품을 분해하여 운반한 화포를 다시 조립하여 공성하였다.

- 전투의 결과 연합함대와 왕당파는 총 2천의 병력을 잃었을 뿐이다. 2만 4천중 9%의 병력손실을 입은데 비해, 프랑스 진압군은 12.5%에 달하는 4천의 병력을 잃었다.

* 나폴레옹의 툴롱 포위전 정리
나폴레옹의 가장 큰 업적은 레뀌에뜨 요새를 탈환한것이 아니다.
그가 도착한 9월 16일 프랑스 집압군은 고작 4문의 캐논포(직사포)와 곡사포 2문을 가진 1개 포대가 전부였고, 지휘명령계통도 엉망이어서 지네 맘대로 포대 위치를 변경하거나 할 정도였다.
나폴레옹이 탄약수송의 한직을 돌아다녔다는 것을 위에서 설명하였다. 그는 곧 이 경험을 토대로 3일만에 14문의 캐논포와 4문의 곡사포를 확보하여 총 3개 포대를 만들었고,
매일 마르세이유로 부터 5천 포대의 모래자루를 날라서 방벽을 쌓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미 확보한 울리울스에 80명의 대장장이를 모아서 포와 포탄을 조병하였다. 그러나, 화약이 문제였다. 
화약이 확보되지 않은 포대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러나, 보급창의 수송임무를 수행한 경험이 여기서도 나와서 보급창과 싸워가며 화약을 확보한다.
10월이 되자, 총 11개의 포대를 배치할 수 있었다.
그는 100문이상의 포를 가지고 10월 15일부터 11월 30일까지 6주간 24시간 리틀지브롤터라 불리던 영국/스페인의 방어선을 두들겨 버린다.
전쟁이 끝날 무렵 그가 보유한 포는 300문이었다.
이렇게 모인 300문을 최초로 집단 운영하였다. 그가 유럽최고의 화력전 전문가라 칭하는 이유이다.
일개 대위가 1개 포대에서 시작하여 총 50개 포대를 자신의 노력으로 만들어 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참고로 한국군 포병전력중 견인포인 155mm 는 총 1500문을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기습이 아닌 지연전의 과는 분명해 보인다.
이때 잃은 70척의 전투함은 이후로도 복귀되지 못했고, 영국과 비등비등하던 해군력은 이후로 영국에 열세로 놓인다.
영국은 이러한 우위로 대륙을 봉쇄하게되고 이후 나폴레옹은 영국봉쇄령으로 맞서지만, 러시아의 영국 무역을 응징한다며 모스크바로 진격.
이후 패망 테크를 탄다.

여기서 하나 재미있는건,
첫째, 나폴레옹이 탄약 수송임무를 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하는 질문이다.
둘째, 툴롱은 나폴레옹을 장군으로 만들어 줬지만, 이때 툴롱에서 프랑스 함대의 손해를 어떻게해서는 최소화 했다면 어땠을까?하는 질문이다. (예를 들어 나머지 프랑스 함대를 동원하여 역포위했다면? 그래서 항복을 받아냈다면? 3개월이라는 전투기간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인간사 승패는 "운"이라는 걸 확인하는 역사의 한장면이었다.

2014/09/08 21:03 2014/09/08 21:03
인간은 언제나 절대 병기를 꿈꾼다.
전쟁이 지속되는한 인류는 언제나 비밀병기, 결전병기등에 심취해 왔다.
아직까지 인류가 만든 최고의 결전병기는 핵무기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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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히틀러가 유대인을 박해하지 않았더라면, 인류역사상 최초로 손에 넣었을 바로 그 병기이다.

그외에 수 많은 실버블릿으로 통할 병기들이 있는데, 바로 이런 것 들이다.
전함 비스마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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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전함으로 발전하는 전함 야마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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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쌩쥐. 마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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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불침함이자, 절대 지상의 왕자로 불렸고 모든 적들을 일방적으로 썰어버릴 절대 병기라 생각되었지만, 결과는 시궁창이었다.

왜 그럴까?
기술적 완성도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이유는 "세력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전차만 보면 공군을 부른다는, 도망가도 용납된다는 M4셔먼만 해도 그 생산댓수가 무려 4만대 이상이다. 워낙 많이 생산되어서 얼마나 생산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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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만대의 셔먼중 유럽전선에 투입된 전차가 3만대 가량으로 추산되는데 (나머지는 태평양 전선) 그 당시 서부전선에 투입된 독일전차의 수는 티거가 600대, 판터가 1,500대 가량으로 합쳐봐야 2천대 정도인데, 3만대가 밀고 올라가고 있었다.
15:1의 숫적 열세를 당해낼 방버이 없다고 하면 정확한 표현이다.

그리고, 태평양 전선은 말해서 뭘하겠는가? 아래는 미국 구축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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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전투함으로 생산한 척수만 1,201척, 총 824만3천톤이다.
대충 7,1062척을 찍어서 전쟁터로 내보냈으니, 당해낼 방도가 없다.

이처럼, 아무리 약한 존재라도 세력이 되면 무섭다.

예를 들어, 우리에게는 편법과 탈세의 온상인 대기업이 무서운 이유도 바로 이런 이유때문이다.
그룹을 이루고 있으면, 왠만한 파고에는 끄떡없는 선단이 된다.

실례로 2차세계대전에서 잠수함에 잡아먹히던 비무장상선의 경우 무장 호위함과 선단을 이루면서 그 혹독한 대서양의 파고를 뛰어넘었었다.

우리가 일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개인은 미약하지만, 그 개인을 잘 묶어서 조직을 만든다면, 강한 상대를 뛰어 넘을 수 있다.
반대로, 개인이 강하지만, 조직으로 만들지 못하면 그 조직은 망한다.

1:n의 커뮤니케이션이 강조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이다.

최소한 우리에게 핵폭탄이 없는 이상은 이만한 도구가 없기 때문이다.









2011/10/01 17:07 2011/10/01 17:07

먼저 극악의 상황에서 작전을 성공리에 마친 UDT/Seal 대원들께 찬사를 보냅니다.
그러나 그 성공에 가려진 지휘부와 정치권의 실수는 2번 다시 되풀이 되면 안되겠기에 이렇게 포스팅을 남깁니다.

전체적인 작전 일지는 부산일보의 엠바고를 깬 폭로이후로 모니터링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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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로 어이상실. 만약 상대가 해적단이 아니라 정보력이 뒷받침되는 국가였다면 그 뒷책임은 어떻게 할것이었나?)
구축작전은 부산일보의 폭로대로 18일 1차전을 치뤘다.
근해를 지나가던 몽골상선을 덮치려고 해선 4~5명이 자선으로 하선하자 (간뎅이가 부어도 엄청 부었다. 구축함옆에서 그런 행동을 하다니...) 기회를 보고있던 UDT대원들이 상선으로 달려나갔고 이와 동시에 링스로부터 총탄이 쏟아져 4~5명의 해적들은 바다로 풍덩하고 우리쪽 3명은 그 와중에 부상을 입게되었다.

만약 해적들이 경험이 있는 녀석들이었다면 선장 또는 조타실 요원 등 바로 옆에 있는 인질들을 함교로 데리고 와서 자신들이 잃어버린 숫자만큼 공개처형했을 것이다.

* 뮌휀의 참극. 어설픈 인질구출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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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군사 작전이라고 해도 이런식의 보복의 책임 전가는 충분히 효과가 있다. (물론 러시아에게는 개뿔이겠지만...)
그러나 해적들은 이 시점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그냥 도망가서 숨고는 석해균(57)선장을 채근해서 빨리 도망가기 바빴던 것이다. 여기서 석해균 선장님의 기지가 살아난다. 평시에는 공제상선 공용망을 통해 영어로 이야기하다가 한국어로 해적에 대한 정보를 계속 주시고 지그제그 운행에다가 식량 바닥이라고 속여서 해적들을 굶기기 까지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이것때문에 후에 총상을 입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3일이 흐르고 드디어 제대로된 진압작전이 펼쳐진다.
1차 작전 실패의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2차 작전이 개시된것이다.
먼저 헬기와 함포로 경고사격 및 정밀 저격작전에 들어가며 해적들을 선내로 밀어 붙이는 데 성공한다.

그 이후로는 잘아는 그대로다.
먼저 헬기의 위압사격을 지속하고 고속정에 2개 팀이 따라 붙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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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른 속력으로 따라붙은 (무려 3.5km를 달려서) 고속정이 헬기의 엄호속에 후미로 따라붙었고 곧이어 구출부대가 투입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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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2개팀으로 나뉘어 수색에 들어갔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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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중요한 조타실에서 일대 격전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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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내 해적들을 제압하고 구출에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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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는 체포하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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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로 제기하고 싶은 것이 바로 작전 전체에 들어난 느낌이다.

1. 상황을 자칫 극악으로 밀어넣을 뻔했던 1차 작전의 실패다.
지휘부는 아무런 준비없이 적이 움직인다는 이유만으로 대원들을 사지로 밀어넣었다.
오히려 해적들의 자선이 떠나고 나서 방심하는 틈을 노렸어야 했다.

2. 작전 전반에서 느껴지는 위에서의 압박이다.
무슨일이 있어도 작전을 개시해서 선원들을 구출하라는 지시가 떨어진 것같은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이대목에서 생각나는 인질사건이 하나 있다. 바로 "페루의 일본 대사관 사건"

1996년 12월 17일 아키히토 일본 천황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페루 주재 일본 대사관에서 열렸는데 MRTA라는 반군 게릴라 14명이 대사관에 난입하여 7백여명의 인질을 붙잡게 된다. 물론 당시 일본계이던 후지모리 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당시 이원영 대사도 인질에 포함되었으나 긴 협상 끝에 1차 인질석방에 포함되었다.
이에 페루정부는 땅굴을 통해 대사관으로 진입할것을 계획하고 주변 소음을 최대한 활용하여 땅굴을 팠고 4개월만인 4월 22일 오후 3시경 땅굴 3개소 입구에 폭약을 터트려 축구하던 인질범 3명을 폭사 시키며 140명의 특공대를 투입한다. 땅굴과 옥상으로부터 진입한 특공대는 인질이 있는 2층으로 제빨리 돌입하여 14명의 인질범을 사살하였고 그 총격전 와중에 2명의 특공대원이 희생되었으며 인질 1명이 사망한다.

당시의 페루의 정치적 상황을 보면 후지모리 대통령의 상황을 보면 답이 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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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년 수도 리마에서 특수부대를 동원해 민간인 15명을 살해
- 92년에는 특수부대를 파견해 학생과 교수 10명을 살해
- 92년 군대를 등에 업고 의회를 강제해산한 뒤 95년 4월 재선
- 96년 일본대사관 인질구출성공
- 2000년 4월에는 부정선거 논란 속에 3선에 성공했다. 같은 해 7월 부정선거와 횡령 의혹 등이 제기됐고 측근이 야당 의원을 매수하는 장면이 담긴 비디오테이프가 공개

이후 일본으로 도주했다가 2005년 칠레에서 체포 페루로 이송된 전대통령은 징역 2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렇다고 이사람이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농과대학 교수로 오히려 깨끗한 이미지 였고 집안 소유의 땅을 팔아 선거자금을 마련하고 트랙터를 개조해서 선거유세를 나섰던 사람이다. 빈곤층의 지지를 받으며 당선되었지만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이다.

96년 당시 후지모리의 지지율은 바닥을 기고 있었고 어떻게든 후지모리로써는 국면전환이 필요했으며 단 한방의 군사작전으로 지지율이 급상승하게 되었다.

다시말해 현재의 대한민국의 정치적 상황과 유사하다.
천안함피격과 연평포격전을 통해 정치권에 쏟아지는 화살을 다 맞아야 했고 고물가로 인해 대통령의 지지율은 계속 하락세였다. 거기다가 파병군인회나 노인들을 동원해 반대파에 대한 백색테러도 마다하지 않았던 정권이었다.
그들 입장에서는 정치적 국면해결을 위해 무언가 필요했고 2010년 12월 천안함피격으로 해군에 내주었던 합동참모본부 합참 작전부장 자리를 연평포격전 이후 육군으로 원복 시킨 상태였다. 즉, 정치권과 군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자 거국적인 일치단결로 본 작전이 진행된 느낌이다.

목적은 숭고하나 다수보다는 나와바리 싸움에서 이기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됐다는 느낌이랄까?

그럼에도 이번 작전은 이러한 몇몇 부분을 제외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자원한도에서 가장 효율적인 작전을 구사했고 그것을 성공시켰다.
우리가 대형헬기가 있었다면 초기부터 헬기강습에 의한 작전을 구사했을 테고 저리 무차별 사격을 하지 않았어도 될 것이다.
기습의 효과가 사라졌음에도 이러한 작전의 성공은 하늘의 운이 따라줬다고 아니할 수 없다.

마지막으로 " 석해균(57)선장님"과 UDT/SEAL 대원 3분의 쾌유를 기원합니다.

PS. K-6의 위력이 새삼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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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 50 탄이 쎈줄만 알았지 저정도 인지는 몰랐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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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피탄흔적을 보면 거의 어른 얼굴 크기만한데다가 강판을 저리 짖니겨 높을 정도니...

2011/01/22 23:43 2011/01/22 23:43

정확한 사료는 아니다.
스탈린의 지시로 1937년 소련군 원수였던 미하일 투하체프스키 원수로 부터 시작된 구 소련군의 대숙청은 1년동안 약 3만 5천명의 장교들을 반역죄로 싸그리 총살했다.
소대장이 연대장되고 사병이 장교가 되는 등 장난아닌 혼란이 발생한다.

소련이 1939년 핀란드에 동원한 병력이 무려 148만 중동부에 배치된 병력은 없다고 치더라도 전체 병력의 겨우 2.3%를 숙청했을 뿐인데 이러한 대규모 혼란이 발생했다.
거기에다가 혼란도 혼란이지만 살아 남은 나머지 97.4%는 무조건 충성하게 된다.

즉, 인형이 되었다는 것이다.
위에서 시키지 않으면 훈련도 할 수 없었고 위에서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하지않도록 되었다.

그결과 핀란드의 겨울전쟁에서는 정말 작디 작은 나라인 핀란드 (겨우 병력 34만에 전차는 30대, 항공기 110대에 불과한)에게 148만의 병력을 동원하고 전차 6500대, 항공기 3800대나 동원해서 처절한 졸전끝에 핀란드 땅 10%를 얻는데 전사자를 묻을 묘지로 사용되기에도 부족한 땅덩어리였다고 하니 어느 정도인지 감이 올 것이다.

이러던 것이 독일의 동방진출 작전때는 전투기가 땅에서 박살나도 아군진지가 독일 탱크에 유린당해도 총 한발 쏘지 못했다. 왜? 위에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독일군의 강점은 엄청나게 많은 수의 참모진들이 둘러싸여 머리 박터지면서 싸워서 얻은 결과를 Boss에게 인가받고 나면 개개인 별로 임무가 하달되고 기본적으로 하사관이 장교 역할을 초급장교는 중급장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되어 각개 전투 부대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는 유기적인 체제인데 비해 소련군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덩치큰 공룡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 결과 독일 침공 초기에 그것도 아주 빠른시간에 소련의 서부방어선은 붕괴해버린다.

21세기 대한민국을 여기에 반추해보면 왜 한국의 조직이 이토록 경직되어 있는지 쉽게 이해가 간다.
가장먼저 생리적 욕구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바로 사회안전망의 부재로 인한 생존권의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가령 나이 40에 회사에서 짤린 차장 또는 부장이 같은 조건의 회사에 취직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항상 그것보다 못한 회사에 취직하기 나름이고 그러한 회사가 잘되서 대박난다면 또 모를까 대부분의 회사는 그럭저럭 입에 풀칠하는 상태로 살아가게된다.

따라서, 대한민국 직장인들은 그냥 위에서 시키는 대로 위에서 허락하는 것만 하게되는데 그게 일반 평사원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임원도 1년짜리 임시직에 불과한 대기업에서 어느 누가 책임 지겠다고 할까?
공은 내꺼야만하고 과는 네꺼야만 내가 살수 있는 세상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사업을 추진하는데 있어 그 추진력이 현저히 맞아 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연출된다.
직장내에서 스스로 무엇인가를 자발적이고 의욕적으로 하려는 자들은 이러한 현실의 벽에 막혀 이도 저도 못하다가 좌절하고 밀려나가는게 현실이다.

차라리 이러한 성향의 직원들만 따로 모아서 회사의 목표와 Align되는 사업을 하고 싶다고 하는 직원들에게 일정 금액의 투자금을 줘보는 것은 어떨까?

이러한 취지로 출발했던 사내벤쳐가 잘못된 운용으로 실효성이 많이 떨어졌지만 그들에게 큰 금액이 아니라 몇천만원 정도 마음껏 해보라고 하는 것은 어떨까?
할려고 하는 의지가 있는 자는 그 예산 한도내에서 어떻게든 쥐어짜내서 무언가를 할 것이고 성과가 난다면 추가적인 투자를 더 해도 회사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을 것이다.
대박나면 회사도 그만큼 버니까.

2011/01/18 13:10 2011/01/18 13:10

갑작이 이런 기사가 떠서 당황스럽다.

=전략=
지난달 23일 연평도 포격 도발 당시 우리 군의 대응 포격으로 사망한 북한 군인 5명에게 후계자 김정은(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이 `공화국영웅칭호'를 수여하도록 지시했다고 대북 단파라디오 `열린북한방송'이 28일 전했다.
=후략=

5명정도 전사했다?

그런데 드는 생각이 이건 쑈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일부 155mm탄이 발사지점을 기점으로 살상반경안에 떨어지기는 했지만 북한군이 도발하기에 앞서서 사전에 아무런 은폐엄폐할 생각도 않고 발사했을리는 만무하다.

가령 그랬다면 무도의 해안포대장은 반역이다.

상부의 지시도 없이 그냥 쏴제겼다는 소리밖에 안되기 때문이다.
결국 남는 가설은 이건 "대한민국 국민들의 적개심을 누그리트리기 위한 쑈"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말해 민간인이 사망한데 한국의 국민들의 분노가 너무 컸다는 사실에 주목한듯 하다.
콘트롤할 수 없는 상황까지가자 이제는 헛소리로 남쪽에 4명 죽었고 북쪽은 +1을 더해서 5명죽었다는 정보를 흘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4명으로 가자니 똑같아서 약간의 분노도 못 누그리뜨릴것 같고 5명이 딱좋다. 4:5니까 이겼다고 큰소리쳐도 되는 숫자가 된다.

이것들이 지금 장난하나? 하는 생각이 너무나도 간절한데 뒤집어 보고 경우수를 따져보아도 북한넘들 하는 짓거리가 딱 이정도 까지이다.

ps. 또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바로 해안포와 130mm 다연장의 발사 시차이다.
포병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화력의 집중인 효력사는 동시 착탄될수록 몇 배로 강력해진다.
그런데 이넘들은 해안포부터 쏴제끼고 반격 받은다음 몇 십분이나 경과해서 130mm 다연장을 쐈다.
무슨 의미일까?

2010/12/28 22:46 2010/12/28 22:46

전쟁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리저리 주어 들은 전쟁의 역사만 많을 뿐 그리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그런 역사에 대해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예로부터 손자는 '도(道)', '천(天)', '지(地)', '장(將)', '법(法)' 5개의 요소가 모두 완벽하게 충족되었을 때 전쟁을 하라고 했고 그(대의명분, 시기(날씨와 때), 지리, 장수, 군법 5가지)중 하나라도 빠져 있다면 전쟁을 하면 안된다고 했다.

손무는 전쟁을 이르기를 "전쟁은 이겼음을 확인하는 단계"라고 했다.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을 이르기를 "전쟁은 정치의 연장선인 무력을 가지고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최근 연평도의 일련의 사건을 바라보면서 많은 이들은 전쟁이 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런의미에서 전쟁이 최근(기계와 근대교육 및 산업화, 공중전이 도입된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어떻게 변했는지 전쟁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번 이야기나 꺼내볼까한다.

고정관념 1. 전쟁은 머릿수가 많으면 이긴다.
No, 중국은 고작 몇개 사단이 안되는 일본에게 발리는 중이었고 일본 역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오버하는 보급선의 길이의 한계로 인해 전진을 멈추었을 뿐이다. 러시아도 마찬가지. 독일의 보급선이 좋았다면... 아니면 해안으로 연결되어 원할하게 해상보급로를 확보했다면 상황의 끝을 알 수 없다.

고정관념 2. 전쟁은 정신력으로 하는 것이다.
반은 Yes, 반은 No, 정신력을 필요로 하는 것은 현장 지휘관 뿐이다. 일개 사병이 정신력을 강조하다가 뛰어나가봐야 송장꼴 난다. 일본군은 정신력이 당시 최강이었지만 하는 짓거리는 착검하고 반자이 하며 기관총 Killzone으로 뛰어든 것 밖에 없다.
따라서, 일반 개개병사는 그 상황을 극복 할 수 있는 정신력을 보유해야 한다. 왜냐면 숯하게 흩어진 시체들을 끊임 없이 보게 되고 공포에 사로잡혀 스스로 미쳐버릴 테니까...
그러나 지휘관은 병사보다 몇 배의 정신력을 보유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필리핀에서 싱가폴에서 지휘관의 오판으로 항복했다가 일본군을 이롭게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고정관념 3. 전쟁은 보병이 총을 쏘고 돌격앞으로 하는 것이다.
No, 현대전은 철저히 보병은 화력유도 임무를 맡은 자일 뿐이다. 극단적인 이야기지만 베트남전 이후로 통신의 발달과 장거리 화력, 근접 항공지원의 발달로 인해 보병은 직접 전투하는 상황보다는 관측하고 대량의 살상 무기를 불러오는 체계로 발달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잘 알기위해 제네레이션 킬을 꼭 한번 시청해보자.
그리고 또하나 보병이 총쏘는 경우는 근접전이 벌어지는 밀림, 도시 시간전의 경우에 한정한다. 그것도 민간인을 보호하기위해 공격측이 약간의 양심을 발휘하는 경우이다.
이스라엘과 러시아는 건물에 대포를 직사로 쏘거나 MOAM과 같은 대형 기화폭탄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
즉, 보병이 숨어 있을 장소는 깡그리 청소해버리는 방법으로 전쟁하기때문에 일부 전장터를 제외하고 보병이 총을 쏠일이 거의없다.

고정관념 4. 전쟁은 승패가 나뉜다.
No, 근대적 국가개념이 존재하기전에는 무언가 전쟁을 하고나면 승자와 패자가 있었고 승자는 패자가 가진 무엇인가를 얻어 갔다. 전비보상이라던가 하는 것이라도 얻었다. 그러나 현대는 아니다. 전쟁을 해도 그리고 이겨도 국가간의 양극화가 심화된 현대에서는 과학/기술/경제 수준이 높은 나라인 전승국이 상대적으로 낮은 나라인 패전국에게 삥 뜯을 수 있는 것이 없다.
가령 한국이 북한과 전쟁을 했다고 치자. 전쟁을 해서 통일까지 갔다고 하다. 그리고나서 지하자원 개발등을 할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끝이다. 인구 5천만의 남쪽 사람들은 인구 3천만의 상대적으로 거지를 부양해야 한다. 남쪽 만도 노령인구도 주체할 수없어 하는 판국에 3천만이나 되는 사람들을 주체 할 수 있을까? 이는 미국이 이라크, 아프칸에서 완벽한 전술적 승리를 거두고도 베트남보다 더 오랜기간 눌러 앉아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형국과 같다. 지배자는 피지배자의 복종과 충성을 얻어내는 대신 피지배자를 먹여 살려야 하는 의무를 지게 되는 것이다. 그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을 때 피지배자는 지배자에게 반기를 든다.
(월급 안나왔을때 사장에게 달려가서 "사장이면 다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보여지는 이유도 원리상으로 볼때 이와 같다고 느껴진다.) 또한 비슷한 나라끼리 싸워 일방적인 승리를 거뒀다고 해도 곧 다가올 국제적 압력이 두렵다.
다시말해 전쟁은 승패가 날 수가 없다.

고정관념 5. 핵을 보유하고 있으면 어느 나라든 최강대열에 낄수있다.
No, 핵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다르다. 핵을 사용하는 순간 인류는 잘해야 석기시대로 들어간다. 특히 한반도는 더욱 그러하다. 핵을 사용하는 순간 글로벌 1,2,3,4가 발끈 할 수 밖에 없는 장소가 바로 한반도이다.
핵우산이라는 것은 다른것이 아니다. 한국이 아무리 핵이 없다고 우기지만 핵우산이란것은 사용자가 한반도의 정치 세력이 아니라 미국이라는 것 밖에 차이가 없다.
북한이 한국에 핵을 쓰는 순간. 미국은 북한을 아무런 생명도 살지않는 땅으로 만들 의무가 생긴다. 남쪽도 그 영향권아래서 제대로 살수나 있을까?
즉, 핵은 한번 쓰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다. 그래서 3차 중동전 당시 그렇게 급박하게 이스라엘군이 밀리는 상황에서도 핵을 결국 사용하지 않았다. 만약 핵을 사용했었다면 소련의 보복으로 이스라엘은 지도에서 사라지고 미국의 보복으로 세계는 공멸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히틀러는 독일이 패망하는 그 순간까지 일본 역시 패망하는 그 순간까지 독가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독가스조차 지맘대로 사용못하는 세상에 살면서 그보다 몇배의 위력에 몇 백배의 후유증을 남기는 핵은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한반도는 전쟁이 나면 안되는 땅이다. 좌우로 좁고 위아래로 길어서 전쟁이 나면 기동전이 어렵다. 대신 해상에서의 우위를 점하기는 쉬운 구조이기에 해상세력이 우월할 수록 전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는 지형이다.
연평도에 배치된 MLRS는 사거리 300km의 미사일을 발사 할 수 있으며 만약 우리의 훈련으로 인해 북한이 공격해온다면 평양에 미사일을 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러나 한반도의 전쟁은 확전이 되면 겆잡을 수 없이 불이 번진다는 가정이라면 반드시 핵이 사용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면 북한은 비정상적인 나라이기 때문이다.

2010/12/19 00:47 2010/12/19 00:47
금번 천안함의 격침이 북한의 공격으로 판명된다면 대한민국이 선택할 군사적 옵션이 몇개 없다.
정치적으로 계산해도 옵션이 별로 없다.

정치적 고려로 인한 경제적 지원 ==> 이미 안하고 있으므로 해보나 마나다.

따라서, 군사적, 외교적 제제방안 밖에 남는게 없는데...
외교적으로 보더라도 유엔에 소를 걸어봤자 솜방망이.
군사적으로는 직접 무력을 투사하기에는 잃을 것이 너무 많다.
그런데 군사적 옵션으로 무력시위는 그렇지 않다.
바로 팀스피리트 훈련의 부활이다.

1976년부터 1993년까지 진행된 팀스피리트 훈련은 홍군과 청군으로 나뉘어 실재 야전에서 기동훈련을 한다.
즉, 실재 부대가 탄약을 적재하고 기동하므로 북한군도 같은 규모로 대응 기동하지 않으면 앉아서 쳐맞아야 하는 우려가 있으므로 죽으라 대응기동한다.

즉, 우리가 10의 자원으로 훈련을 한다치면 북한은 못해도 7정도의 자원을 때려 부어야 한다는 이야기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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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한의 경제규모는 2008년 기준 37.7배가 많은데 우리가 같은 규모로 군사비용을 쓴다고 계산하면 북한의 입장에서는 찢어지게 가난한 나라가 또 국방비에 투자해야 하므로 가랑이 찢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과거 북한이라는 정치집단은 죽으라 팀스피릿 훈련 반대를 외쳐온것이다.
만약 북한의 소행이라 밝혀지면 "팀 스피리트 훈련"을 부활시키자.
1980년대 B-52와 항공모함까지 동원된 전략 훈련이 21C에는 어떻게 바뀔까?
F-22, B-2 폭격기는 기본 옵션으로 한반도 상공을 날라다닐터이고 동해와 서해에 항모 2개 전단 정도 떠있는 상황에 지상군 기갑부대가 기동한다고 할때 북한군도 역시 똥줄채우며 대응 기동해야 할 것이 자명한 일이다.
그렇게 10년정도 흐르면 과연 북한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나올지 한번 쯤 두고보자.
2010/04/19 18:36 2010/04/19 18:36
일단 하나 밝혀 두고 싶은것이 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을 빼고는 논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고 어디까지나 중국의 역사적 사실보다는 내전과 전쟁으로 뒤범벅되어온 중국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학교에서와 다양한 책을 통해 알게된 중국의 역사를 가지고 논하고자한다. (주1)

중국의 역사는 100% 진실이라는 가정하에 본 글이 쓰여졌다.

일단 "하"나라라고 하는 나라가 있었다. 중국문명의 태동기이다.
그리고 하나라 말기에 걸왕이라는 엄청 똑똑하고 힘좋은 왕이 있었는데 막판에 "말희"라는 여자를 얻으려 제후국을 힘으로 누르고 그녀를 얻었지만 그녀의 걸왕에 대한 요구는 끝이 없어 호화스러운 궁을 새로짖거나 연못을 술로 채우고 주변 나무에는 육포를 걸어두고 나체주의정신으로 놀아 났다는 "주지육림"이라는 고사성어를 탄생시키는 등의 질펀나게 놀아나다가 제후국의 "상"나라 탕왕이 걸왕과 말희를 힘으로 추방하여 황제국이 된다.
이후의 역사를 "은나라" 또는 "상나라"라 불렀으나 마지막왕인 주왕은 하나라의 걸왕과 아주 빼다 박은 인물인지라 "달기"라는 여자를 공물로 받았는데 환락의 끝을 보고 싶다하여 120일동안 "주지육림"에서 잔치를 하고 기름을 바른 구리기둥위를 죄수들이 걷게하고 간언하는 자들은 죽여서 젓갈을 담그고 포를 떠서 인육을 먹었다고한다.
"은" 역시 후에 제후국중 하나인 "주"에게 멸망을 당하게 된다.

"주"는 본격적인 봉건국가 였다고 전해지고 건국초기부터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어 다스리게 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제후국들이 주군 몰래 세력다툼하고 서로 땅따먹기 했는데 이때를 "춘추시대"라하고 이후에 진나라가 "조","위","한" 3개 가문이 분리 독립하면서 "전국시대"를 열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주군의 나라는 개뿔.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형국이 된다. (마치 일본의 히데요시가 1차 전국 통일하기전의 상황과 같다.)
그러다가 "진"의 "영정"이 나머지 국가를 모두 박살내고 스스로 황제에 올라 "시황제" 즉, "진시황"이 탄생한다.

이때 "진"은 스스로 동쪽에 만리장성을 쌓아 외부의 침입을 막고 안으로는 아방궁을 지었지만 오래가지 못해 유방과 항우로 대표되는 내란 끝에 유방이 "한"을 세우게 된다.
그러다가 잠깐 10여년간 "한"왕조의 외척이 세운 "신"이라는 나라가 있었고 후에 다시 "한"이 복귀하는데 이를 "전한/신/후한"으로 나누게 된다.

"후한"시대말기 그 유명한 "위촉오"삼국시대가 열리게 되나 후에 "진"에 의해 통일되지만 "위진남북조시대"라 하여 동진, 서진, 북조, 남조, 16국 등등등의 나라로 나뉘어 또 내란(?)의 시기로 접어들다가 "북주"에 의해 "수나라"가 세워진다. 무리한 세금에다가 만리장성 넘어의 고구려 침공 실패로 곧 멸망하고 다시 "당나라"가 건국된다.

중국의 역사에서 "당"이 차지하는 위치가 높은데 이는 최초로 만리장성 밖의 동방진출과 서쪽 실크로드를 통한 외부교역등에 성공한 시기이다. (이때 나온것이 삼장법사와 손오공이 나오는 서유기)

당이 망하자 이번에는 "5대16국시대"라 하여 또 내전이다.

복잡한 정세로 인해 정신없는 와중에 등장한것이 거란족이 세운 "요", 기존 중국 토착민의 "송(이후에 남송, 북송으로 또 분열)", 여진족의 "금" 등이 중국 땅덩어리를 가지고 다투게 되나 징기스칸의 몽골에 전부 버로우하였고 후에 "원"이 성립된다.
이때의 원의 역사가 남긴 족적에 비해 중국에서 폄하되는 이유는 아마도 이민족의 나라이기 때문이리라.
암튼 원이 망하자 다시 한족의  "명"이 건국되지만 임진왜란으로 통하는 동북아 전쟁에 재정압박을 받고 만주족(금나라의 후예이니 여진족이라 함이 옳을듯)에게 멸망하여 "청"이 건국된다.

중국이 왜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쓸수 없는지에 대한 모순이 여기서 발생한다.

1. 한족에 대한 역사 기술은 "원", "청", "요", "금"에 대한 기술을 할수가 없다. (주2)
2. China 는 "지나" 즉, 진나라인 이라는 뜻으로 "한족"은 "진"을 계승한 한의 후예라는 뜻이다.
   즉, 한족의 역사기술은 동쪽으로는 만리장성에 영토가 제한된다.

다시말해 중국은 현재의 중국을 통합하여 관리할 수 있는 역사개념이 필요한데 이에 대한 접근이 공교롭게도 주변국과 문제를 일으킬수 밖에 없는 현재의 영토중심 역사관이다. (주3)
그러나 더 큰문제는 영토중심으로 기술하다보니 기존의 고서들과 역사적 충돌이 필연적으로 발생한다는 점이다.
"중화" 사고방식으로는 만리장성 밖에 어떠한 문명도 없어야 한다.

다시말해 오랑캐 부족국가만 존재해야 하는데 바로 오른편에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이 뚜렷한 문명의 족적을 남겨버렸다.

따라서, 만리장성밖에서 유물이 출토될때마다 만리장성의 길이가 늘어나는 것이다.
中 동북공정 조작 고구려 땅 깊숙이
한국일보 원문 기사전송 2009-12-15 02:41

중국이 또 다시 과거 고구려 영토에 '만리장성 유물심기'에 나섰다.

중국의 반관영통신 중국신문사는 14일 기원전 3세기 진한(秦漢)시대에 축적된 만리장성 유적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지린(吉林)성 만리장성 자원조사단을 인용, 퉁화(通化)현 싼커 위수진 일대에서 만리장성 유적 11곳을 발굴했다고 보도했다. 발굴된 유적은 옛 성터와 봉화대 등으로 만리장성 부속시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중국 고고학계는 이에 앞서 지난 9월에도 퉁화현 싼커 위수진 남쪽에서 만리장성 유적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를 근거로 만리장성의 북쪽 동단(東端)이 지금까지 알려졌던 랴오닝(遼寧)성 신빈(新賓)보다 10.9㎞ 더 동쪽인 퉁화현 임이 입증됐다고 주장했다.

퉁화현은 인근 지안(集安)과 함께 고구려 대표적 유적지로 2006년 고구려 초기 것으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군 2기가 발견됐다. 당시 중국 학계는 이를 근거로 기원전 37년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한 터는 당초 알려진 환런(桓仁)현이 아니라 퉁화현이라고 주장했다.

중국이 만리장성 북쪽 동단을 고구려 영토 내로 더 연장한 이유는 '고구려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동북공정의 논리를 굳히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중국은 앞서 지난 4월 만리장성의 길이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보다 2,500km가 더 긴 8,851.8km인 것으로 확인됐다고 발표한 데 이어, 9월에는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산해관(山海關)이 아니라 북한과 접경지역인 단둥(丹東)의 후산성(虎山城)이라고 주장했다. 후산성은 고구려의 대표적 산성인 박작성(泊灼城)으로 당(唐)태종의 침략에도 함락되지 않았던 성이다. 중국측도 2004년 후산성을 증축하기 전까지 후산성이 고구려의 유적임을 인정, 성벽과 대형 우물 터 등에 고구려 유적임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까지 내걸었으나 최근 만리장성의 동쪽 끝 지점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중국 국가문물국은 지난 9월 이후 '만리장성 동단=후산성' 이라고 명명한 표지 개막식을 했으며 고고학계는 역사 교과서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헐...

주1) 다시말해 잡설 이상의 수준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2) "우리가 적용하고 있는 단일 민족 사관으로는 원, 청, 요, 금,수, 당, 남북조의 북조의 대부분 및 오대십국의 대부분 역시 기술을 할 수 없습니다"로 바로님의 지적에 따라 정정합니다.
주3) 중화라는 개념자체를 바르게 인식하지 못한 오류입니다. 중화는 전세계를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다시말해 중화의 역사로 본다면 중원과 기타 지역이고 모든 세계가 자신을 중심에서 돌아간다는 시각이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중국의 역사는 아직도 씌여지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겠군요.... (헐퀴.. 이 생각이 더 무섭다...)
2009/12/21 11:18 2009/12/21 11:18

기동전의 "기"자도 모르는 일본군 출신들의 무능을 까보자.

1. 채병덕
이 인간 간첩이 분명한 장군이었다.
1950년 북침떠들다가 1950년 6월 24일 전장병중 50%에게 휴가 실시. 동일 저녁 장교클럽 오픈 파티로 거의 모든 장교소집해서 술퍼먹인 인간되겠다. 거기다가 첩보대가 찍어온 전차의 사진을 묵살하였으며 개전첫날 의정부-포천 방어선에서 무너지는 7사단을 지원한다는 명분으로 수도사단 및 예비 3개 사단을 축차 투입! 5개 사단을 말아먹은 인간이다.(당시 한국군은 8개 사단이 전부)
거기다가 철수중 수많은 장비도 버려두고 한강대교 폭파!!
더군더나 분대장에게 까지 즉결권 부여. 이후 맘에 안든다고 부하 죽여 버리고 난리도 아님.

2. 유재흥
이 인간은 원균의 재림이었다. 만주군 대위 출신으로 1949년 4.3사건의 전투사령관으로 민간인 학살 지휘.
개전초 7사단장으로 부하를 잃는다. 물론 그럴수 있다. 다른 전선도 붕괴중.
이후 2군단장으로 평남 덕천, 영원 지구 전투에서 6,7,8사단 괴멸. 여기까지도 있을수 있는 일이다. 다른 전선도 붕괴중이었으니까..
이후 3군단장으로 군단 보급로인 오마치 고개가 중공군 중대병력에게 점령됨. 갑자기 군단장은 작전회의를 핑계로 비행기 편으로 후방으로 가고 (당시 회의주관자인 백선엽장군의 회고록에는 작전회의에 없었다고 회고) 이어서 후방이 차단당했다는 압박감에 모든 군단병력이 와해되었고 계급장 떼고 후방으로 도주 시작. 이후 3일간 70km나 밀린 끝에 전선 대붕괴와 함께 3군단 전멸. 이후 밴플리트는 한국군 총사령관 정일권과 3군단 사령부로 급히 가서 3군단 해체하고 작전권을 한국군으로 부터 박탈함.
더 재미있는것은 자신때문에 뺐긴 전시작전권 환수 반대를 외쳤음. 최고임!


2009/09/09 00:25 2009/09/09 00:25

이스라엘인들이 주장하는 자신의 역사를 100% 사실이라는 가정하에 그 오랜 시간을 이집트의 노예로 지낸후 이집트 왕자였던 모세의 방황을 따라 사막을 돌아 다닌끝에 기원전 1900년경에 가나안 지역에 정착하였고 무려 700년동안 뭐했지는 모르겠지만 기원전 11세기경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이른다.

익히 알고 있는 다윗과 솔로몬에 의해 최고 전성기를 누린 이스라엘은 기원전 9세기경 유대왕국과 이스라엘 왕국으로 분열하더니 이스라엘왕국은 기원전 722년 당시 중동의 최강자였던 아시리아에 그 짧은 국가로써의 역사를 마감하고 유대왕국은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지도에서 삭제당한다.

기원전 1세기경에 로마에 의해 나라가 다시 세워지나 기원후 70년경에 로마에 대한 저항으로 결국 다시 망하고 만다. 이당시 이스라엘 민중으로 부터 존경받는 인물이 예수였다는 주장과 함께 그를 따르는 12제자의 일대기가 바로 성경으로 로마에 대한 저항과 기존 사제단과의 마찰, 기적과 죽음과 부활의 내용을 다루고 있다. (역사적으로 실존하였느냐는 별개로 하자)

이렇게 왕창왕창 자기나라 말아 먹은 이스라엘인들은 여기 저기 흩어져 살게 되는데 이들이 선택한 방법은 자신의 정체성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다른 나라에서 집단 거주 지역을 만들게 된다.
마치 미국이라는 거대한 나라에 한인타운, 차이나타운, 제패니스타운 등이 있는 것처럼 떠돌이 정착민 이스라엘인들도 저들 스스로 촌락을 세우고 집단으로 모여살았던 것이다.
(이점은 분명히 하고 넘어가자. 이렇게 집단으로 모여살고 직업/교육이 허락되지 않자 그들은 당시에는 천하다고 여긴 장사를 하였고 아이들의 교육은 가정에서 이루어진다. 2000년정도 지난후의 그 결과가 현재의 유태인의 모습이다.)

그렇게 융화되지 못하고 살자. 1280년 모로코에서는 "밀라"라고 하는 강제 격리구역을 만들어 난민수용소와 같이 이스라엘인들을 쳐넣고 가둬버린다. 이것이 점점 퍼져서 14~15세기경에는 전유럽으로 확대되었고 1516년경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에서는 운하사이의 작은 섬에 정착허가를 받고 살고 있었는데 그 지역명이 바로 게토누오보(Ghetto Nuovo), "새로지어진 주물공장"이란  뜻이다. 후에 터키에 살던 유대인들도 정착을 하였는데 게토베키오(Ghetto Vecchio), "옛날 주물공장"이란 뜻으로 이후 유대인이 사는 곳을 "게토"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로마교황청은 게토를 강변 늪지대로 설정하고 이곳에 벽을 세운후에 밤마다 잠궈 유대인의 야간 통행을 원천차단해버린다.

20세기 나치에 의해 유대인은 격리되고 이런 지역을 게토라 나치 독일 점령지 곳곳에 세워진다.
또한 그들 스스로를 감시하기위한 유대인 경찰도 존재하였다.

* 해방후의 게토 어린이들 (아우슈비츠에 비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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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토의 유대인 경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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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샤바 게토 봉기사건의 한부분을 이야기한 "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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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의 유대인들은 자신들 이송결과가 가스실이라는 사실을 알자 지하기구였던 유대인투쟁기구가 앞장서서 무장봉기하게된다. 먼저 물러난 독일군은 4월 20일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실시하였고 4주간의 진압작전끝인 5월 16일 독일측 사상자 수백명에 유대인 전사자만 5만이 넘는 참혹한 결과로 끝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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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정리하여 천천히 굶겨 죽이기로 작정한 나치는 무장 저항 사건으로 인해 대놓고 죽이기 시작한것이다.
이사건이 터진 한참후인 1970년 우리가 감동했던 역사의 한장면이 연출되는데 바로 1970년 겨울 독일의 빌리 브란트 총리는 무장 저항이 있었던 바로 그장소에서 게토 추모비에 헌화하며 무릎을 꿇은 바로 그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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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에 영국에 의해 독립한 이후 이스라엘은 주변국과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해 갔고 그 자세한 이야기는 일전에 이스라엘 전쟁사라는 글을 남겼었다.

1. 건국편
2. 1차전쟁편
3. 2차전쟁편
4. 3차전쟁편(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5. 4차전쟁편(번외, 60대1의사나이, 이집트, 시리아, 반격)

기나긴 전쟁이후 빼앗긴 팔레스타인인의 무장투쟁은 뭔헨 올림픽 테러등을 통해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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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전쟁끝에 20세기말 PLO 아라파트와 이스라엘정부는 대립을 종식시키고 팔레스타인의 땅으로 가자지구와 웨스트뱅크를 팔레스타인 독립국으로 인정하는 평화서명을 한다.
그 평화의 길을 열었던 이스라엘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이스라엘 극우에게 암살 당했지만 끝없는 노력끝에 1999년 9월 5일 와이리버 평화협정 이행합의서에 서명했다.

* 라빈총리와 조갑제 인터뷰 장면으로 인터뷰 30여 시간후 암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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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거나 가자와 웨스트 뱅크지역을 할당받아(실은 거주허가를 받았다고 해야 하나?) 향후 독립국가로써의 로드맵대로 진행되는듯 했다. (자치정부 수립-독립국 수립)

* 이스라엘에서 이집트와 접한 구석텅이와 동예루살렘의 웨스트뱅크(이지역은 요르단으로 뺐은 지역)이 바로 팔레스타인 자치정부의 영토로 합의된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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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꼴을 못보는 이스라엘인들은 꼬딱지만한 가자지구를 방벽으로 쳐버리고 출입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과거 나치에서 배운 방법 그대로 팔레스타인들을 괴롭히는데 밤에 아무소리없이 군인들이 들이닥쳐 불심검문을 한다던가 말좀 안먹힌다 싶으면 방벽을 봉쇄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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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라 단 360 제곱킬로미터의 공간에 150만명이 살고 있는데 1인당 0.24 제곱미터 다시말해 24X24cm의 공간만 허락된 옛날의 나치 게토와 전혀 달를게 없는 상황이되어 버린다.

* 팔레스타인들에게는 장벽넘어의 해변도 꿈이며 사치에 불과한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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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중에 아라파트 사후 기존 PLO를 대체한 하마스는 2008년 1월 23일 장벽을 폭파시켜 이집트로의 길을 연다.

* 폭파한 장벽밖 이집트로 나온 팔레스타인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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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벽이 뚤린 이스라엘은 천천히 고사시키기 전략에서 아에 대놓고 죽이기로 바꿔 2009년 새해 벽두부터 전쟁을 해대는데 죽은자만 1,000여명이다.

* 거대 폭탄은 기본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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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구밀집지역에서 사용금지된 백린탄 무차별 사격에다가 야간사격도 우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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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만 지켜도 이렇게까지 많은 사상자가 생기지 않았을텐데 너무나 아쉽다.
그리고 그 역사를 지켜봐야 하는 나도 너무 괴롭다.
이스라엘인들이여. 속히 이성을 찾기 바라며 가자지구 희생자에게 깉은 애도를 보낸다.

* 스스로 악의축이 된 이스라엘에게 경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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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1/16 11:24 2009/01/16 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