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는 하버드대의 수재였다. 아버지는 부유한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었고, 판단력이 뛰어났다. 이상도 높았고 건강했다.
그러나 31세에 부모와 세상에 적대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돌연 잠적하더니 마약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사망했다. ‘전쟁 영웅이었고 평화운동가였다’는 부음 기사가 나갔다(141번 사례).

#2. 활발하던 한 학생은 결혼 후 세 아이를 낳고 이혼했다. 자신의 성정체성을 깨닫고 동성애 인권운동가가 됐다. 삶에 더 남은 것이 없다며 술에 빠져 살다가 64세에 계단에서 떨어져 죽었다(47번 사례).

1937년 미국 하버드대 남학생 2백68명이 한 연구를 위해 선발됐다. 세계 최고의 대학에 입학한 수재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고 야심만만하고 환경에 적응을 잘하는 이들이었다. 후에 제35대 미국 대통령이 된 존 F 케네디, 워싱턴포스트 편집인으로서 닉슨의 워터게이트사건 보도를 총괄 지휘했던 벤 브래들리도 끼어 있었다.

당시 2학년생으로 전도유망했던 하버드생들의 일생을 72년에 걸쳐 추적한 결과가 지난 5월 12일 미국 시사월간지 <애틀랜틱 먼슬리> 6월호에 공개됐다. 연구는 과연 ‘잘 사는 삶’이라는 것이 있는지, ‘잘 사는 삶’에는 일정한 공식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진행됐다. 인간을 행복으로 이끄는 열쇠를 찾아보기 위한 여정이기도 했다. 그래서 <애틀랜틱 먼슬리>는 기사 제목을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What Makes Us Happy)’라고 붙였다.

1967년부터 이 연구를 주도해온 하버드의대 정신과의 조지 베일런트 교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이며, 행복은 결국 사랑”이라고 결론지었다.
연구 결과 47세 무렵까지 형성돼 있는 인간관계가 이후 생애를 결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변수였다.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 가장 안정적인 성공을 이루기도 했다. 연구 대상자의 약 3분의 1은 한때 정신질환도 겪었다. “하버드 엘리트라는 껍데기 아래엔 고통 받는 심장이 있었다”고 잡지는 표현했다. 행복하게 늙어가는 데 필요한 요소는 7가지로 추려졌다. 고통에 적응하는 ‘성숙한 자세’가 첫째였고, 다음으로 교육, 안정적 결혼, 금연, 금주, 운동, 적당한 체중이 필요했다.

베일런트 교수는 “어떠한 데이터로도 밝혀낼 수 없는 극적인 주파수를 발산하는 것이 삶”이라고 말했다. 연구를 진행하며 그가 얻은 ‘삶’에 대한 결론을 묻자 “삶은 과학으로 판단하기에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숫자로 말하기엔 너무나 아름답고,학술지에만 실리기에는 영원한 것”이라고 답했다.

특정 개인의 역사를 장기적으로 추적한 ‘종적(縱的) 연구’의 최고봉을 보여주는 ‘하버드대 2학년생 2백68명 생애 연구’는 1937년 당시 하버드의대 교수 알리 복이 시동을 걸었다. 연구를 재정적으로 지원한 백화점 재벌 W. T. 그랜트의 이름을 따서 ‘그랜트 연구’라고도 불린다. 종적 연구는 장기간에 걸쳐 엄청난 자금과 연구진이 동원돼야 가능하다. 그러나 수십 년간 돈을 댈 인물이나 기관도 극히 드물고, 치밀하게 연구를 진행할 수준 높은 연구진을 찾기도 쉽지 않다. 그래서 이번 하버드생 연구는 더욱 의미를 발한다고 <애틀랜틱 먼슬리>는 평가했다. 심리학과 의학 등 인간 연구의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연구방법론의 변화가 수 십 년간의 자료에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연구는 ‘잘 사는 삶에 일정한 공식이 있을까’라는 기본적인 의문에서 출발했다.
연구진에는 하버드대 생리학, 약학, 인류학, 심리학 분야의 최고 두뇌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2백68명을 대상으로 정기적인 인터뷰와 설문을 통해 신체적, 정신적 건강을 체크했다. 어릴 때 침대에 오줌을 쌌던 기억에서부터 이성에 눈뜬 시기까지, 개인적인 체험과 심리상태를 치밀하게 자료화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파일은 그가 사망한 후 기밀로 분류돼 2040년까지는 공개가 금지됐다.

2백68명 대상자 중 절반 정도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남은 이들도 80대, 90대에 이르렀다. 베일런트 교수는 대상자들의 행적이 담긴 파일을 소개하며 “기쁨과 비탄은 섬세하게 직조(織造)돼 있다”는 윌리엄 블레이크(1757~1827)의 시구를 인용하기도 했다. 인간의 삶에 닥치는 고통을 어떻게 이겨내느냐가 후일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요소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베일런트 교수 자신도 세 번의 결혼과 이혼을 거쳐 결국 두 번째 부인과 재결합한 남다른 길을 걸어왔다. 저명한 고고학자였던 그의 아버지는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 사실을 자녀들에게 감추려고 애썼다.

이번 연구는 베일런트 교수 자신의 인생 여정 탐구이기도 했다.
최고 엘리트답게 하버드생들의 출발은 상쾌했다.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한 사람이 4명이었고 대통령도 나왔다. 유명한 소설가도 있었다. 그러나 연구 시작 후 10년이 지난 1948년 즈음부터 20명이 심각한 정신질환을 호소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이들은 점점 늘었다. 50세 무렵엔 약 3분의 1이 한때 정신질환을 앓았다. 행복하게 나이가 들어가는 데 필요한 ‘행복 요소’ 7가지 가운데 50세에 5, 6개를 갖춘 1백6명 중 절반이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고 있었다. ‘불행하고 아픈’ 이들은 7.5퍼센트에 그쳤다.

반면 50세에 3개 이하를 갖춘 이들 중 80세에 행복하고 건강하게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3개 이하의 요소를 갖춘 사람은 그 이상을 갖춘 사람보다 80세 이전에 사망할 확률이 3배 높았다.

50세 때 콜레스테롤 수치는 장수(長壽)와 무관했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 콜레스테롤 수치가 중요한 시기가 있고, 무시해야 할 시기가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어릴 적
성격도 장기적으로는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수줍음을 타던 어린이가 청년기에는 고전하더라도 70세에는 외향적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았다.
대학교 때의 꾸준한 운동은 그 후 삶의 신체적 건강보다는 정신적 건강에 긍정적인영향을 끼쳤다.
성공적인 노후로 이끄는 열쇠는 지성이나 계급이 아니라 사회적 적성, 즉 인간관계였다. 형제·자매 관계도 중요하다. 65세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의 93퍼센트가 이전에 형제·자매와 원만하게 지낸 사람들이었다.

이번 연구 결과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비드 브룩스는 5월 12일자 칼럼에서 “이번 연구는 대작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상력 속에서만 가능할 것 같은 소설 같은 삶이 현실에도 존재함을 보여준다”고 평했다.

브룩스도 베일런트 교수의 결론에 동감했다. “과학의 잣대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을정도로 삶은 미묘하고 복잡한 것이다.”

2009/09/07 11:33 2009/09/07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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